이종길기자
에버튼 신축 구장 디자인
영국 리버풀과 독일 드레스덴에는 '세계유산 등재 취소'라는 뼈아픈 기록이 남아 있다. 국가유산청이 19일 언론 간담회에서 이들의 사례를 환기한 이유는 명확하다. 세계유산이라는 타이틀은 한번 쓰면 벗겨지지 않는 '영원한 면류관'이 아니다. 개발의 편의가 유산의 본질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앞서는 순간, 그 영광은 언제든 박탈될 수 있다.
드레스덴 엘베 계곡은 2009년 세계유산 역사상 최초로 등재가 취소됐다. 원인은 도심 교통난 해소를 위한 4차선 '발트슐뢰스헨 교량' 건설이었다. 강동진 경성대 교수는 "당시 유네스코가 다리가 계곡의 연속된 역사적 풍광을 단절시킨다고 수차례 경고했지만, 드레스덴 시는 '주민 투표 찬성'과 '교통 편의'라는 국내적 명분을 앞세워 착공을 강행했다"고 설명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세계유산영향평가 언론 설명회에서 모두 발언하고 있다. 2026.1.19 조용준 기자
유네스코는 즉각 '위험 유산'으로 지정하며 마지막 기회를 줬지만, 다리가 완공되자 가차 없이 등재를 취소했다. 국내법 절차가 완료되었다고 해서 국제 협약을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준 뼈아픈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리버풀 역시 마찬가지다. 18~19세기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항만 재개발 사업 '리버풀 워터스'를 추진하면서 유네스코와 충돌했다. 개발사는 낙후된 항구를 살린다며 초고층 빌딩 계획을 고수했다.
강동진 교수는 "리버풀은 2012년부터 약 10년간 '위험 유산' 유예 기간을 얻었음에도 근본적인 계획 수정을 거부해 2021년 영구 제명됐다"며 "경제적 논리만 앞세우다 국가 브랜드라는 더 큰 가치를 잃은 전형적인 사례"라고 분석했다.
서울 종묘와 세운4구역 연합뉴스
김충호 서울시립대 교수는 한국이 이러한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문화유산보존복원연구센터(ICCROM)에서 연구 경력을 가진 그는 "세계유산협약 가입국으로서 세계유산영향평가(HIA)는 선택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행정적 판단이 아니라 이행해야 할 국제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이어 "실제로 유네스코의 HIA 요청이 있는데도 이를 하지 않고 사업을 강행한 사례는 (국제사회에서) 보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HIA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위기를 넘긴 도시들도 있다. 오스트리아 빈이 대표적인 예다. 도심 재개발(호이마르크트 타워)로 2017년 위험 유산에 올랐으나, 독단적 강행 대신 정밀한 HIA를 택했다.
김지홍 한양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빈의 경우 HIA 시뮬레이션을 통해 고층 타워가 벨베데레 궁전의 주요 조망점(View Point)을 해친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했다"며 "빈 당국이 이 결과를 받아들여 건물 높이를 낮추는 설계 변경안을 유네스코에 제출하면서 위험 유산 해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유산지구' 결정된 종묘 연합뉴스
독일 쾰른 대성당 역시 라인강 건너편 빌딩 계획을 대폭 수정해 유산 지위를 지켜냈다. 김지홍 교수는 "성공한 도시들의 공통점은 HIA를 단순한 규제가 아닌 '유산과 개발이 공존할 수 있는 최적의 디자인을 찾는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이라며 "한국 역시 '설마 취소되겠어'라는 안일함을 버리고 국제적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