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복숭아와 사귀다/고영민

사 온 다음 날부터 하나둘

복숭아가 썩기 시작한다

작정한 것처럼

과즙을 뚝뚝 흘리며

두 개 세 개 무른 복숭아를 먹어 치운다

복숭아도 질세라 부랴부랴

썩는다

누가 먼저 먹어 치우고

누가 먼저 썩어 버리는지

내기라도 한 것 같다

자고 일어나니

또 몇 개 복숭아는 썩어 있다

썩은 곳을 도려내고

끈적한 손으로 성한 나머지를

먹는다

한 상자 복숭아를 고스란히

다 먹겠다는 것은 욕심

누구든 집에 복숭아를 들이면

반은 먹고 반은 버린다는

생각

■무슨 일인들 그렇지 않을까. "반은 버린다는" 생각, 반은 포기한다는 생각, 반은 떠나보낸다는 생각. 아무리 욕심을 낸다 한들 복숭아는 복숭아대로 절반은 상하고, 돈은 돈대로 쑥쑥 빠져나가고, 어떤 일은 시작도 못 해 보고 쌓여만 있고, 정작 보고 싶은 사람은 영영 만나질 못하고. 그래도 그래서 복숭아는 절반은 먹었고, 돈은 쥐꼬리만큼씩이나마 모이고 있고, 돌아보면 부끄럽지 않게 매일매일 부지런하게 살았고, 문득 외로울 때도 있지만 곁에 있는 사람을 새삼 바라보게 되고. 다행이지 않은가, 절반은 건졌으니,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기서 함빡 웃고 있으니. 채상우 시인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