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푸틴과 최태민 일가②러시아 요승도 영생교 교주도 세상 흔들었지만 '끝'은 쓸쓸
영적 능력으로 권력자를 사로잡아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문란한 생활로 물의를 빚은 점 등의 유사성을 들어 최태민은 종종 라스푸틴에 비교되곤 했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요승 라스푸틴은 불치병인 혈우병으로 고생하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치료하며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표도로브나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어 전횡을 일삼았다.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인간에게 닥쳐올 재앙을 방비하는 일 또는, 갖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불행을 극복케 하는 행위는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한다. 현재와 곧 다가올 미래의 예고된 결핍에 대한 인간의 불안은 설령 당사자가 강인한 지도자일지라도 그 판단력조차 손쉽게 앗아간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에게 나일강의 범람 또는 고갈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안이었기에 제사장의 예언은 곧 신의 말이었고, 권력 또한 왕권을 위협할 만큼 막강해졌다. 제정러시아 차르에게 황위를 계승할 유일한 아들은 국가의 미래였으므로, 장안에 파다한 추문과 국정을 농단하는 라스푸틴의 전횡은 황태자의 생명을 위해 눈감을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1979년 6월 10일 ‘제1회 새마음 제전’ 행사장에서 포착된 당시 영부인 대행 박근혜(가운데)와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장 최순실 (그 왼쪽), 사진 = 뉴스타파 영상 캡쳐
“거세하라” 엄명에도 두둔하고 묵인하며당시 최태민의 비위 행각이 지속적으로 중앙정보부와 비서실을 통해 보고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7년 9월 12일, 최태민을 직접 불러 심문하기에 이른다. 당시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과 백광현 국장, 그리고 영애 박근혜가 동석해 대질심문을 했으나, 문제의 심각성에 관계없이 영애는 최 목사를 두둔했고, 이후 10·26까지 최태민은 큰 탈 없이 영애를 곁을 지킬 수 있었다. 이날 심문을 놓고 선우연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이 고민 끝에 자신에게 내린 ‘은밀한 지시’를 비망록에 기록한 바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그에게 “최태민을 향후 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고”라며 특명을 내렸으나, 이 내용을 전해 들은 영애가 직접 대통령과 선우 비서관에 읍소해 유야무야된 관계로 구국봉사단은 2년 뒤인 1979년 5월 1일,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꿔 더욱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고, 이 봉사단의 대학생 총연합회장인 최순실은 영애와 각별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이때 둘의 관계는 뉴스타파 보도를 통해 공개된 1979년 6월 10일 ‘제1회 새마음 제전’ 영상에서 확인되듯 각별하고 친밀했다.
박근혜 - 박근령 자매는 육영재단의 운영권을 놓고 1990년 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박근령과 박지만은 노태우 대통령에 친필서한을 보내 '언니가 최태민 목사에게 속고있다'고 읍소한 바 있다. 사진은 2008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34주기 추도식에서 마주한 박근령과 박근혜 대통령. 사진 = 연합뉴스
권력의 교체, 위장된 굴신지난 25일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서 최순실을 두고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홍보 분야에서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그녀의 ‘과거 어려움’은 어머니의 부재 후 마주했던 최태민과 봉사단 활동에 이어 5년 만에 급작스러운 10·26으로 아버지마저 잃고, 그야말로 실의에 빠진 그녀를 또 한 번 극복할 수 있게 도운(?) 인연을 말할 것이다. 이들 부녀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굴신하는 태세를 취하다 이내 육영재단과 숭모회를 매개 삼아 권력의 주변부를 맴돌았고, 두 단체를 온전히 장악하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과 형제간의 거리를 넓혀나갔다. 1990년 육영재단을 놓고 형제간 다툼이 일자 박근령과 박지만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진정코 저희 언니는 최태민 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라고 읍소한 바 있다. 이때도 육영재단 분란의 핵심으로 ‘형제간 갈등’이란 외피보다, 배후의 최태민에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각종 의혹과 비리문제, 그리고 박근혜 당시 육영재단 이사장과의 관계가 주목받자 그는 생전 유일하게 남긴 인터뷰(가정조선 1990년 10월호) 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교육을 받은 박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강력하게 부인했고, 박근혜 이사장은 동생 박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겨주고 물러났지만, 끝까지 최태민에 대한 의혹에 대해서는 함구하며 그가 죽는 1994년 5월까지 인연을 이어나갔다.
최태민의 자녀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 규모는 모두 수천 억대에 이르나, 그 부동산 구입배경과 비용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진 = SBS 뉴스 화면 캡쳐
셋방살이에서 부동산재벌로‘최태민 수사자료’에서 영애 박근혜를 만나기 전까지 최태민은 사이비 종교단체의 교주이자 기업체 대표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65년 천일창고를 경영하던 당시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자 4년간 도피생활을 이어갔고, 1971년에는 영세교(혹은 영생교)를 창시하며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에 나섰으나 경제적인 문제로 늘 어려움을 겪어 활동 거처를 수차례 옮겨야 했다. 그런 최태민 일가의 경제적 곤란은 영애 박근혜와의 만남이 성사된 후로 일거에 해결된다. 대한구국봉사단에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어진 4년간의 기관활동으로 막대한 지원금을 손에 쥔 최태민은 1994년 사망 후 자녀들에게도 수백 억대의 재산을 남겼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측근으로 지목된 최순실의 막대한 재산이 박 후보의 차명재산이라는 의심을 사자 그녀는 “유치원 경영이 순조롭게 이뤄져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고 반박했으나, 300억 대 규모의 재산 대부분은 아버지 최태민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현재 그녀를 비롯한 동생 최순천 부부 소유의 부동산은 시세 1,300억 원, 언니 최순득이 소유한 부동산 역시 1,000억 원대로 확인되며 재산형성의 배경과 자금 출처를 의심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5일 대국민사과를 통해 최순실을 중심으로 한 '비선 실세'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사진 = 연합뉴스
공간만 있을 뿐 시간은 없는 나라최태민에서 최순실로 이어진 거대한 정치·종교 스캔들은 이들 부녀를 한국판 라스푸틴의 현현(顯現)으로 비추고 있다. 라스푸틴의 본명은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노비흐’로 라스푸틴(Распутин, 방탕한 놈)은 유년시절부터 방탕한 생활을 일삼은 그를 조롱하던 이웃들이 부른 호칭이었다. 수도승을 자처하며 전국을 떠돌다 황태자 치료를 계기로 황궁에 출입, 내정간섭을 시작하면서 잇따른 실책을 범한 라스푸틴은 귀족들의 암살 위협에 앞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유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의 예언가적 면모가 돋보인다. “만일 내가 내 형제와도 같은 러시아 국민들의 손에 죽게 된다면 러시아 황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 그러나 내가 만일 특권층, 귀족들의 손에 죽는다면 (...) 그들은 모두 러시아 민중들에게 죽임당할 것이다.” 독약으로도, 총으로도, 둔기로도 죽지 않던 그는 얼어붙은 네바 강에 던져지고 나서야 죽음을 맞았다. 며칠 뒤 뭍으로 건져 올린 그의 사체 부검결과 사인은 총상이 아닌 익사였고, 그의 예언대로(?) 황제일가는 볼셰비키에 의해 전원 총살당했고 귀족들 또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최순실은 논란 후 처음 이뤄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적 공분을 사 도피 중인 상황임에도 측면촬영을 요구할 정도로 외부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상황을 통제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용서를 구하고 죄가 있다면 (벌은) 달게 받겠다’고 하다가도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발언은 도피를 합리화하는 변명에 불과했다. 퍼스트레이디 신분의 영애 박근혜 뒤에서 부정축재를 일삼던 최태민의 전횡은 이제 대통령 박근혜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제사장 노릇을 한 딸 최순실의 굿판으로 승계됐고, 영생을 꿈꾸며 미륵을 자처했던 최태민은 1994년 5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그 딸 최순실은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명쾌한 해명 없이 기약 못 할 국외도피 중인 상태다. 잘못은 최순실이 했지만, 사과는 대통령이 하는 사회. 헤겔은 수많은 왕조가 명멸하는 와중에도 1000년간 백성의 생활은 바뀌지 않은 중국을 두고 ‘공간만 있을 뿐 시간은 없는 나라’라고 지칭한 바 있다. 아버지로부터 딸에게 이어진 정권의 이면엔 추악한 사제의 농간 역시 아버지로부터 딸에게 이어져 국가의 기강을 흔들고 시간을 멈춰 세웠다. 레바 강의 얼음을 깨고 건져 올린 라스푸틴의 시체는 비참한 형상과 함께 그 욕망의 상징을 거세당해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고, 십상시는 조조와 그 부하들의 손에 무참히 도륙당했다. 역사가 기록하는 비극으로부터 이들은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대통령의 오장육부는 왜 국외를 떠돌고 있는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비정상인 혼(魂)에 불과한 것일까.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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