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야 수학여행도 해외로 가는 시절이지만 나 어릴 적 반 친구들과 처음 떠난 수학여행지는 경주였다. 신라 천 년의 유물들이 잠들어 있는 옛 도읍지 경주가 그동안 머릿속에 잠겨 있는 경주의 전부였다. 특별할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 다시 찾은 경주는 10대에 보았던, 20대에 느낀 그 경주가 아니었다. 하동에서 경주로 넘어가면서 본 경주의 모습은 수직의 기라성이 사라진 수평의 마을이었다. 땅 가까이, 나직하게 일렁이는 불빛들. 어린 왕자의 보아뱀에 갇힌 코끼리처럼 옛 시간에 갇혔지만 따뜻한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분칠만 하고 있는 경주인 줄 알았는데, 아름다운 민낯이 숨 쉬고 있었다. 늘 보던 산이, 하늘이, 달빛의 빛깔마저 참 고왔던 밤이었다.
“집 앞에 능이 있으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영화 『경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다. 여주인공 윤희가 최현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데요.” 그러자 윤희는 “경주에서는 능을 보지 않고 살기 힘들어요”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렇다. 경주는 능이 아주 많다. 신라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시내 한가운데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 신라의 무덤은 능, 총, 묘로 구분한다. 어느 왕의 무덤인지 확실하면 ‘능’이라 하고, 출토된 유물의 보존 가치가 높지만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때는 ‘총’, 귀족 이하 일반인의 무덤에는 ‘묘’라 부른다. 대릉원은 『삼국사기』에 ‘미추왕을 대릉에서 장사지냈다’는 기록에서 유래한다. 능 앞에 대나무숲이 있는데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죽현릉, 죽능으로도 불렸단다.
철부지 아이들은 능에서 미끄럼타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경주 사람들에게 능은 고이고이 간직해야 할 문화재만은 아닌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봐온 풍경과도 같은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하고, 때때로 ‘곁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깨달음의 상징인 것 같기도 하다. 능에 달빛이 비추는 밤이면 긴 산책을 떠나고 싶어진다. 한여름의 경주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 이유다.
슈만과클라라는 예전 동국대 네거리에 있던 음반 가게였고 지금은 커피 좀 마신다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유명한 커피 전문점이다. 이곳의 주인은 커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또는 커피에 미쳐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음반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커피 공부를 하다 보니 커피 전문점까지 하게 되었다나. 이렇게 솔직할 수가! 주인의 성정이 풍겨나오는 대목이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슈만과클라라의 주인 내외와 인사를 나누게 됐고 원두가 보관 중인 창고 구경은 물론 운 좋게도 세계에서 몇 대 남지 않은 문화재급 로스팅기에서 원두를 로스팅하는 과정도 지켜볼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커피콩을 볶으며 스스로를 10년째 들볶고 있다’는 성우제 커피 칼럼니스트의 표현이 가장 적당하다. 로스팅 기계를 해체하여 자신만의 도면을 그려 낡은 골동품을 어르고 달래며 커피를 로스팅하고 있으니 슈만과클라라의 주인은 극구 사양하시겠지만 커피 장인이란 빛나는 수식어를 달아드리고 싶다. 이 집의 핸드 드립 커피는 곁에 두고 몇 시간이고 커피와 하찮은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수다를 떨고 싶어지는 맛이다.
*소곤소곤 Tip*
<친절한 경주시> 문화 관광 특별시를 꿈꾸는 경주시의 문화 인프라는 대단히 바람직하다. 봄꽃 명소를 찾아 헤매다 전화를 걸으니 문자로 주차할 곳의 주소까지 전송해준다. 또 홈페이지(//guide.gyeongju.go.kr)에서 경주 관광지의 실시간 영상도 볼 수 있다.
Infomation
경주시청 //guide.gyeongju.go.kr, 064-779-8585(경주시 문화관광과), 1330(경주 관광안내전화)
대릉원 경북 경주시 노동동 12(대릉원공영주차장), 09:00~22:00, 2000원
슈만과클라라 경북 경주시 한빛길36번길 36-1, 054-749-9449, 11:00~23:00, 둘째 주 화요일 휴무
글=책 만드는 여행가 조경자(//blog.naver.com/travelfoodie), 사진=황승희, 슈만과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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