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형선의 <해를 품은 달> 옥진비록(玉塵秘錄)
<div class="blockquote">조선 시대에 카메라가, 종이컵을 든 여인이, 패딩 점퍼가, 염색 머리가 등장한다. 중전의 치마 색깔이 한 순간에 바뀌기도 한다. MBC <해를 품은 달>은 높은 시청률만큼이나 ‘옥의 티’로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다. 짧게는 61분에서 길게는 72분을 오가는 러닝타임, 주 2회 방송, 게다가 의상과 소품의 디테일이 중요한 사극의 특성상 급박한 현장 상황을 시청자에게 들키고 마는 것은 이 작품의 슬픈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청자와 제작진 못지 않게 이러한 ‘옥의 티’를 놀라고 두려워 할 이들이 있으니 바로 드라마 속 세상을 사는 극 중 인물들이다. 이훤(김수현)의 오른팔, 상선내관 형선(정은표)이 바라본 21세기에서 온 ‘옥의 티’는 어떤 의미일까. 전지적 조선시대 시점으로 준비했다.
오늘도 저하께서 조강朝講을 빼먹고 월장越牆하시었다. 이 달 들어 들킨 것은 처음이지만 실은 벌써 엿새째다. 치도곤을 당하고 오니 엉덩잇살이 쓰려서 견딜 수가 없다. 하늘은 어찌 충심으로 살아가는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리신단 말인가. 물론 내가 사도목四都目에서 불통을 받지만 않았어도, 시험과목인 <중용>을 세자 저하께 집중 과외 받지만 않았어도, 파직을 면하고 품계를 올려 세자저하께 큰 빚을 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리가 없다. 이것이 엄자치와 김처선의 뒤를 이을 내시계의 큰 별, 나 형선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길 밖에. 다만 궐내에 괴이한 소문이 퍼지고 있어 걱정스러울 뿐이다. 인경이 울리기 전 중전 마마께서 천추전에 들르시어 주상전하를 뵈옵고 나오셨다는데, 안에서는 황색이던 치마가 달빛 아래서는 연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이 모두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무슨 조화일까. 침방에서 양면 비단이라도 구해온 것이 아니라면, 아니 그렇다 해도 중전 마마께서 치마를 뒤집어 입으실 시간과 장소가...불충한 상상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어이쿠, 엉덩이야.
오늘도 금군들에게 끌려가 호되게 당하였다. 세자 저하의 명에 따라 홍문관 대제학의 여식을 모셔왔는데 이판의 여식이라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조차 힘겹지만 훗날 성군이 되실 세자 저하를 위해 사마천의 마음으로 상세한 기록을 남기려 한다. 지난 번 월장 사건 이후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이셨던 세자 저하께서 오늘은 모처럼 동궁전 익위사들과 양명군 저하께서 이끄는 선전관으로 편을 갈라 축국 시합을 하시었다. 친견만 하시면 될 것을, 직접 뛰시다 혹여 옥체라도 상하시거나 주상 전하께서 아시는 날엔 나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 분명하여 비장의 입술 내밀기를 시전해 보았지만 차갑게 무시당했다. 세자 저하는 바보, 양명군 저하만 바라보는 바보. 아, 이게 무슨 불충의 글이냐. 방금 쓴 것은 취소다! 어쨌든 민화공주님과 예동들, 나인들이 구경을 나와 한창 달아오른 경기 중 세자 저하께서 내가 가르쳐 드렸던 폭풍차기 기술을 선보이시는데, 한편에 검고 둥그런 쇠통을 들고 세자 저하를 겨냥하고 있던 두 사내가 포착되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색이 괴이하고 상투를 틀지 않은 데다 애체를 쓴 자까지 있는 걸 보니 명나라에서 보낸 자객이 분명하다는 나의 전광석화 같은 판단으로, 그 자들이 세자 저하께 총포를 쏘기라도 하면 온몸으로 막아서 저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하고 뛰어들려는 찰나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전에는 충천각모衝天角帽가 밤하늘에서 갑자기 동궁전 뜰로 내려오는 등 물괴物怪가 눈에 보여 혼비백산하였는데, 대체 이는 무슨 징조일까. 게다가 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들을 본 이가 없으니 세자 저하를 위한 나의 충심 또한 증명할 길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저하께서는 연우 아가씨의 뇌리에 남은 저하의 첫인상이 내시 아니면 도둑, 아니면 내시 도둑일 것이라는 나의 명철하고 충정어린 분석에 “꼴도 보기 싫으니 돌아서 있으라”고 호령하셨을 뿐이고, 내가 금군들에게 끌려갈 때도 우두커니 보고만 계시었다. 그렇다. 바보는 나다. 세자 저하만 바라보는 형선이는 바보!
오늘도 몹시 추웠다. 물론 섣달그믐이니 아니 추울 수는 없겠지만 매해 위령굿이 열리는 날이면 나는 물론 세자 저하의 건강이 염려되어 동분서주하곤 했다. 그런데 허문학 그 자, 그렇게 안 봤는데 약삭빠른 구석이 있는 듯 하다. 모두들 추위에 떨면서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있는데 홀로 검은 솜옷을 가져와 다리를 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의 예리한 시선에 포착된 것을 눈치 채자마자 황급히 솜옷을 감추기는 했지만, 요즘 반가의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노수패이수露需敗理守를 이 한양멋쟁이 형선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것이다. 허나 이 추위에 나는 은월각 지붕 위에 기어 올라가 연우 아가씨와 담소 중이신 세자 저하를 위해 종이비나 뿌리는 신세일 뿐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은 찬바람 때문일까. 내 사가에 있었으면 아이가 벌써 셋이련만! 노구에 고소공포증도 있는데! 내 비록 내시이나 계집은 아닌데 진달래색 꽃종이나 곱게 자르고! 부채질까지 해가면서! 내가 어렵게 특급 정보를 입수해 와도 “네가 가져온 정보는 늘 뒷북만 치지 않느냐!”고 호통만 치시고, 입 다물고 있으면 “왜 빨리 말하지 않았냐!”고 다그치시는 분을 위해 이토록 충심을 다하고 있는데! 세자 저하, 저도 노수패이스 사주소서! 노수패이수 사주소서!
오늘도 눈치보다 하루를 다 보냈다. 세자빈께서 몹시 아프신 바람에 사가로 돌아가셨다. 이로 인해 세자 저하께서도 침통해 하시어 동궁전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이럴 바에는 눈 마주칠 때마다 시간 나실 때마다 “연우가 내게 상추를 보낸 이유를 너는 알겠느냐?”라고 물으신 뒤 대답도 안 들으시고 혼자 상추에 담긴 깊은 의미와 세자빈 마마의 국모로서의 싹수에 대해 줄줄 읊어주시는 걸 열네 번, 아니 백 사십 번 더 하셔도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허문학에게 “그대를 잃고 싶지 않고,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니까!”라고 고함을 지르시며 “허문학의 누이를”이라는 목적어를 생략하시어 큰 파문을 일으키셨을 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 같다. 세자 저하께서 “꼴도 보기 싫으니 내일까지 돌아서 있거라”라고 하셔도 충신 된 도리로 기꺼이 받자올 텐데, 오늘은 허문학마저 병자의 가족이라 하여 궐을 떠났다. 그런데 허문학이 떠나는 길 가에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역시 검은 액체가 든 희고 길쭉한 잔을 들고 있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허문학의 발길 닿는 곳마다 여인들이 따르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나 여인이 댕기를 드리지도 쪽을 지지도 않고 어깨 아래서 머리카락을 뎅겅 잘라 늘어뜨린 데다 들고 있던 검은 액체의 정체 또한 알 수 없으니 흑주술을 부리는 자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혹시 세자빈의 병환도 그 액체 때문은 아닌지, 성수청에 가서 나 형선의 예리한 추리력을 들려주어야겠다. 무녀들도 감탄하겠지.
오늘도 바쁜 하루였다. 요즘 주상 전하께서는 변덕이 죽 끓듯, 아 이 무슨 불충하고 천박한 표현이냐. 그게 아니라 심기가 미친년 널 뛰듯, 아...강녕전을 향해 사배하고 반성한다. 어쨌든 어느 날은 “형선이 너는 어찌 좀 더 깊은 어심을 읽어야지 뭐하는 것이냐. 생각하는 것이 이리 저급해서야. 이래서 내가 요즘 너와 말을 잘 섞지 않는 것이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분간 돌아서 있으라!”고 하셨다가 어느 날은 상참의常參儀와 조계朝啓 때도 온화한 모습을 보이신다. 그런데 최근 또다시 양명군 저하에 대한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어 주상 전하께 말씀을 드려야 할까 말까 고민이다. 양명군 저하께서 궐 밖을 다니실 때는 사당패나 승려로 변장을 하시는 것도 모자라 구레나룻을 적갈색으로 물들이고 다니신다는데, 예로부터 붉은 머리나 노랑머리는 아들과 인연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무래도 왕권에 완전히 미련을 버리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은 아닐까. 아, 아무래도 주상 전하께 보고를 올려야겠다. 이렇듯 하나를 보고 열을 깨우치는 나 형선의 충성심과 명민함에 주상 전하 또한 감동하시어 따뜻한 국화차 한 잔이라도 권해 주시겠지.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10 아시아 글. 최지은 five@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취재팀 글. 최지은 five@편집팀 편집. 장경진 three@ⓒ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