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열기자
창업주 루이프랑소와 까르티에의 아들 알프레도(왼쪽두번째)와 세 아들[사진제공:까르띠에]
◆ 대를 이은 보석 장인, 까르띠에 가(家) = '까르띠에'의 창업주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는 1847년 그의 주인이었던 아돌프 피카르로부터 파리 몽토르겨이가 29번지에 있는 보석 아뜰리에(작업장)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보석사업을 시작한다. 이미 그는 일년 전에 그의 이니셜인 L과 C로 둘러싸인 하트와 마름모꼴을 그의 장인마크로 등록한 후였다. 까르띠에 하우스의 시작이었던 셈이다.그는 꾸준히 사업을 확장해 파리 상류층이 자주 찾는다는 이탈리아 대로 9번가에 새 매장을 냈다. 아들이었던 루이 알프레드 까르띠에에게 기술을 가르쳐 본격적으로 사업을 물려줄 준비를 한 시기도 이 때다. 사세를 키워나가던 알프레드는 1899년 파리의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뤼드라빼 13번지로 매장을 옮긴다.이후 알프레드는 자신의 세 아들들에게 각각 까르띠에 하우스의 경영을 맡기면서 해외진출도 본격화한다. 장남 루이 조제프는 파리를, 차남 삐에르 카미유는 뉴욕을, 삼남 자끄 떼오뒬은 런던에 터를 마련,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황실의 보석상' 되다 =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인 에드워드 7세는 자신이 왕자로 있을 때부터 까르띠에를 일컬어 '왕의 보석상' '보석상의 왕'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결국 에드워드 7세는 1902년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대관식에 사용할 27개의 티아라(왕관의 일종) 제작을 까르띠에에게 맡긴다. 또 1904년에는 까르띠에를 영국 황실 최초로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한다.당시 이 일은 유럽 일대에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나갔다. 까르띠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시암(현 태국), 그리스, 세르비아, 벨기에, 루마니아, 이집트, 알바니아의 왕실과 오를레앙 일가, 모나코 공국으로부터 비슷한 자격을 부여받는다. 알프레드의 세 아들들은 자신들의 고급 살롱에서 귀족 출신 고객을 유치하면서 직접 해외를 돌며 자신들의 명성을 전파했다.까르띠에 최고 인기상품인 트리니티.
◆ 불멸의 디자인 '트리니티' = 알프레드의 장남인 루이 까르띠에는 특유의 창조적인 작품으로 까르띠에의 명성을 한껏 높였다. 당시로선 생소한 플래티넘(백금)을 보석류에 도입했다. 작품전시회를 열고 러시아 귀족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1924년 그가 자신의 친구인 시인 장 꼭도를 위해 만든 트리니티는 지금까지도 불멸의 디자인으로 칭송받고 있다.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