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필 감독 영화 '파반느'
초라해질 용기로 맞잡은 세 청춘 생존기
타인의 시선을 깨고 회복하는 인간 존엄
외모는 자본주의 사회가 구축한 가장 지독하고 견고한 계급이다. 박민규 작가가 2009년 출간한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이 명제를 한국 문단으로 끌고 와 묵직한 파장을 일으켰다. 시간적 배경은 백화점, 프로야구 등 소비문화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1980년대 중반이다. 화려함의 이면에서 외모와 스펙이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새로운 권력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종필 감독은 17년 전 이 소설을 영화 '파반느'로 부활시켰다. 1980년대의 서늘한 예언이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지배하는 현재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디지털 기술의 확산과 맞물려 한층 기형적으로 진화한 외모지상주의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영화는 백화점을 거대한 욕망 전시장으로 고스란히 계승해 세 청춘의 궤적을 좇는다. 세상이 추함으로 낙인찍어 지하 창고로 숨어든 미정(고아성)과 무용수의 꿈을 잃고 주차 요원으로 전락한 경록(문상민), 그리고 이들 주변을 맴도는 자유로운 영혼 요한(변요한)이다. 화려한 명품관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지하 주차장과 창고에서 서로가 품은 상실감과 수치심을 거침없이 내보이며 서툴지만 단단한 연대를 다진다.
이 감독은 공간적 대비를 통해 인간의 등급을 매기는 비정한 시스템을 정면으로 해부한다.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명품관과 매연이 가득한 지하 주차장은 현대판 신분 제도의 축소판이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이 유일한 권력으로 군림하는 기형적인 현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타인의 폭력적인 시선으로 개인의 상품 가치를 끊임없이 재단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정조준한다.
미정은 폭력적인 시스템의 억압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세상이 추함으로 낙인찍자 타인의 시선을 피해 지하 창고로 철저히 숨어든다. 극단적인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내면을 내준다. 이 감독은 이런 그녀를 단순한 관음의 대상이나 가여운 희생양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움츠린 어깨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더 깊게 조명해, 관객이 일상에서 무심코 던졌던 폭력적인 시선을 스스로 마주하도록 강제한다.
시선의 권력을 뒤바꾼 연출은 원작이 보인 비평적 맹점마저 단호하게 지워낸다. 소설 속 남성 화자는 추한 여성을 동정하고 구원하는 시혜적 태도를 띤다는 비판을 받았다. 영화는 경록을 정서적 암전에 빠진 초라한 청춘으로 묘사해, 우월한 남성의 일방적인 구원 서사를 단호히 차단한다. 대신 철저히 바닥으로 추락한 두 인간이 평등한 눈높이에서 손을 맞잡는 처절한 생존기에 집중한다. 경록이 미정을 세상 밖으로 이끄는 동시에, 미정 역시 경록을 지독한 무기력에서 구출하는 식이다.
서툰 연대에 밀도를 더하는 핵심축은 요한이다. 록 음악에 기대어 세상의 허위의식을 비웃지만, 실상은 비정한 시스템의 모순에 가장 깊게 베인 인물이다. 자신의 치명적인 상처를 태연한 냉소로 철저히 위장하지만, 동일한 결핍을 앓는 이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각한다. 이 단단한 방어기제 아래 은닉한 온기는 두 불완전한 남녀를 하나로 묶는 결정적 촉매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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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보여주는 결속은 기형적인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반격이다. 원작이 1980년대를 빌려 폭로한 자본주의적 허영과 소외는 오늘날 한층 더 치밀하고 잔인하게 진화했다. '파반느'는 타인의 시선에 갇혀 스스로를 전시장에 진열하기에 이른 현실에 서늘한 경종을 울린다. 나아가 결핍을 인정한 이들의 연대를 앞세워 서열화된 잣대라는 감옥을 허문다. 기꺼이 초라해질 용기로 타인을 껴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과 진정한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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