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공주는 1436년 문종의 적장녀로 태어났다. 그녀가 5살 되던 해, 남동생 단종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를 잃는 슬픔을 겪었으나 아버지 문종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성장했다. 1450년 경혜공주는 영양위 정종과 혼인했다. 문종은 딸을 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크고 화려한 저택을 지어줄 만큼 공주를 아꼈다.
하지만 문종이 서거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며 비극이 시작됐다. 수양대군은 왕 주변의 간신들을 제거한다는 빌미로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그다음까지도 노렸다. 결국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단종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전라도 광주로 유배됐다. 경혜공주는 유배길을 따라갔고, 남편과 함께 살며 아들 정미수와 딸을 낳고 부부의 정을 지켜나갔다.
시대의 광풍은 이들 가족의 행복을 집어삼켰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노산군으로 격하시킨 뒤 영월로 보내어 죽였다. 정종도 역적이라며 온몸이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경혜공주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노비로 전락했다. 야사에 따르면 노비가 된 뒤에도 경혜공주는 "나는 왕의 딸이다"고 외치며 관아의 부당한 요구에 맞섰다고 한다.
공주가 잃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마저 폐서인돼 무덤이 파헤쳐졌다. 이렇게 천지가 뒤집히는 비극 속에서 경혜공주를 살게끔 한 것은 두 명의 자녀였다. 한때 비구니가 돼 속세를 떠났던 경혜공주였지만, 4년 뒤에 다시 세조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경혜공주는 정미수를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에게 보냈는데, 지독한 가난 때문도 있겠고 그것이 자식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정희왕후는 조카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정미수를 왕궁으로 들여와 키웠고, 덕분에 세조는 정미수에게 너그러웠다. 세조는 경혜공주에게 옷이나 전답, 그리고 몰수됐던 재산들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오랜 시름이 몸의 병이 되었던지, 1473년, 공주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죽기 사흘 전 남긴 경혜공주의 분재기(재산 상속문서)에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아들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문서 끝에 선명하게 찍힌 '경혜공주인(慶惠公主印)'이라는 붉은 인장은 비록 노비로 떨어지는 일을 겪었음에도 끝까지 조선의 공주라는 자신의 입장을 놓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해도 경혜공주는 세조의 시대를 살아갔다. 그가 주는 녹을 받고, 그가 내려주는 혜택을 받으며 살았다. 어떻게 가족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자신을 모욕한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느냐는 모멸감은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경혜공주는 죽음 대신 삶을 선택했다. 그것이 살아남은 가족인 자식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었기에.
다만 정미수는 자식을 남기지 못했고, 딸 해주 정씨도 결혼을 했지만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을 보면 후사를 남기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경혜공주와 그 자식들의 존재 자체가 세조와 그의 권신들이 저지른 죄의 상징이었다. 역사의 기로에 섰을 때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어느 것이 더 훌륭하고 절개를 세우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을 수 있으나, 경혜공주는 틀림없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삶을 선택했다. 경혜공주가 남긴 붉은 인장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굴욕을 이기고 살아간 한 여성의 강인한 생명력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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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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