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호남취재본부 제주 담당 국장
박창원 호남취재본부 국장.
제주도가 고(故) 박진경 대령 추도비 옆에 세운 '바로 세운 진실' 안내판 내용 중 일부가 보고서에 나열된 두 가지 사실 중 일부만 선택적으로 발췌된 것으로 보여, 행정 당국이 스스로 갈등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현재 제주도는 이 안내판을 두고 "암살범의 변명을 정설로 둔갑시켰다"는 시민사회의 반발에 직면해 있다. 이에 항의하는 현수막을 강제 철거하려는 제주도의 행정력과 시민단체가 정면충돌하면서 추도비 앞은 연일 소란스럽다.
제주도는 "안내판 문구는 2003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했기에 객관적 사실"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기자가 보고서 원문을 꼼꼼히 대조해 본 결과, 행정의 주장은 교묘하게 '한쪽의 내용만 골라낸' '반쪽짜리 진실'로 보여 향후에도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가 4·3의 복잡한 진실을 규명하며 끝까지 지켜온 대원칙은 '양론 병기(兩論 倂記)'다. 진실을 확정하기 어렵거나 주장이 첨예한 사안에 대해서는, 심판자가 되어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는 대신 양측의 주장을 나란히 기록해 판단을 유보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8년 5월 1일 발생한 '오라리 방화 사건'이다. 보고서는 이 사건을 기술하며 "무장대의 소행"이라는 경찰 측 기록과, "경찰과 우익단체의 조작"이라는 주민 증언을 동등한 비중으로 병기했다.
이 외에도 3·1절 발포사건과 5·10 선거 무산 원인 등에 대해서도 군경과 주민의 엇갈린 기록과 기억을 동등하게 존중하며 보고서에 포함했다. 권력을 가진 쪽의 기록과 당한 쪽의 기억을 공평하게 다루는 균형 감각, 이것이 보고서가 지향한 4·3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이번 논란의 핵심인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은 어떨까. 보고서는 박 대령에 대해서도 이 '양론 병기'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보고서에는 암살 가담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은 무차별 학살이 아니라, 양민과 폭도를 분리해 도민을 죽음에서 구출하려던 '양면작전(선무공작)'이었다"는 故 채명신 장군(당시 소위)의 긍정적 증언도 분명히 함께 기록되어 있다.
'암살범의 명분'과 '동료의 평가'라는 두 가지 시선을 모두 담아낸 것이다.
문제는 제주도가 안내판을 제작하면서 이 균형의 저울을 깨뜨렸다는 점이다. 도는 보고서에 있는 채명신 장군의 증언은 삭제하고, 오로지 살인 후 증거 인멸을 시도했던 암살범들의 일방적 주장만을 '유일한 진실'인 양 비석에 새겼다. 다른 사건에서는 그토록 철저히 지키던 '상호 존중'의 원칙이, 유독 박진경 사건 앞에서만 실종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주장'의 출처다. 안내판이 핵심 근거로 삼은 문구는 군 작전명령서나 법원의 공적 속기록 등 1차 사료가 아니다.
기자가 확인한 결과, 해당 내용은 <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14일 자 기사 등을 재인용한 것에 불과했다. 녹음기도 없던 시절, 소란스러운 법정 방청석에서 기자가 수기로 받아적은 기사가 피고인의 발언을 100% 정확하게 담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백번 양보해 정부 보고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암살범들의 진술을 기록으로 인정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묻고 싶다. 같은 보고서에 실린, 훗날 국군의 표상이 된 故 채명신 파월 사령관의 증언은 왜 가위로 오려냈는가.
보고서가 병기해 놓은 두 개의 기록 중, 장군 묘역을 거부하고 병사 묘역에 잠들어 있는 가장 신망받는 군인의 증언은 버리고 입맛에 맞는 다른 한쪽 암살범의 인터뷰만 떼어내 유일한 진실인 양 전시하는 것. 이것은 인용이 아니라 명백한 왜곡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통계는 감정보다 냉정하다. 4·3 희생자의 절대다수인 약 86% 이상은 박진경 대령이 암살(1948년 6월 18일)당한 이후인 그해 초겨울부터 이듬해 초에 발생했다. 소위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대규모 학살은 그가 죽고 난 뒤에 벌어졌다.
실제로 보고서(220쪽)조차 "박진경 연대장 재임 때의 인명피해는 그해 겨울 대규모 집단 총살 극으로 벌어진 강경 진압 작전 때와 비교하면 많은 수는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군인으로서 상부의 진압 명령을 수행했을 뿐인 현장 지휘관에게, 그가 죽은 뒤에 벌어진 참극의 책임까지 덮어씌워 '학살의 주범'으로 낙인찍는 것은 과도한 처사다. 유독 故 박진경 대령에게만 이토록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행정이 계속 확대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지난주 보도자료를 통해 함병선 연대장 공적비 등 도내 10여 곳의 군경 관련 시설물에도 이와 유사한 방식의 안내판 설치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박진경 추도비에서 시작된 불씨에 기름을 붓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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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이 공권력을 동원해 편집된 '선택적 진실'을 강요할 때, 배제된 다른 한쪽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다. 불균형의 기록은 필연적으로 분열을 낳는다. 지금 추도비 앞에 세워진 저 안내판은 역사를 바로 세운 것이 아니다. 행정의 오만으로 '갈등을 다시 세운' 꼴이 되었다.
호남취재본부 박창원 기자 capta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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