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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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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프랑스 '도멘 미쉘 르부르정(Domaine Michel Rebourgeon)'

부르고뉴 포마르 소재 가족 경영 와이너리
구조가 먼저 형성되는 피노 누아
'포마르 트와 테루와' 포마르 핵심 세 밭의 조화

편집자주하늘 아래 같은 와인은 없습니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도멘 미쉘 르부르정의 포도밭 전경.[사진=도멘 미쉘 르부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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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표 와인산지 부르고뉴에는 시간이 말을 거는 와인이 존재한다. 잔을 들자마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 몇 모금을 삼킨 뒤에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도멘 미쉘 르부르정(Domaine Michel Rebourgeon)'의 와인은 향은 절제됐고, 구조는 분명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첫인상보다 잔의 중반과 끝에서 더 많은 것이 남는다. 느린 전개는 취향보다는 조건에 가깝다. 이 와이너리가 들어선 곳이 '포마르(Pommard)'이기 때문이다.


도멘 미쉘 르부르정은 1964년 마리 부르고뉴(Marie Bourgogne)와 에밀 클로드 르부르정(Emile Claude Rebourgeon)이 결혼하면서 출발했다. 이 부부의 아들인 미쉘 르부르정(Michel Rebourgeon)이 포마르에 정착하며 현재 이름을 갖게 됐다. 미쉘의 딸인 델핀 르부르정(Delphine Rebourgeon)과 스티브 화이트헤드(Steve Whitehead) 부부가 운영 중이며, 포마르를 중심으로 본(Beaune)과 볼네(Volnay) 일대의 포도밭을 관리하고 있다.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도멘 미쉘 르부르정의 포마르 '레 노종(Les Noisons)' 포도밭 전경.[사진=도멘 미쉘 르부르정]

총면적은 4.25헥타르(ha)로 부르고뉴에서는 흔한 소규모 와이너리다. 그러나 부르고뉴에서 작다는 건 규모라기보다 태도다. 확장을 전제로 하지 않고, 이미 가진 밭을 더 깊이 이해하는 방향. 르부르정은 늘 그 선택을 반복해 왔다. 이 도멘의 와인이 유행하는 향이나 질감으로 소비되지 않고, 언제나 비슷한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멘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포도밭의 배열이다. 르부르정은 포마르를 중심으로 부르고뉴 와인의 수도로 불리는 본(Beaune)과 볼네(Volnay)를 곁에 둔다. 중심과 주변이 분명한 배치다. 이 배치는 와인의 인상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포마르는 구조를 만들고, 본은 그 구조를 한층 정제하며, 볼네는 질감의 결을 바꾼다. 르부르정의 와인이 "한 도멘 안에서 부르고뉴를 축약해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 포마르는 늦게 이해되는가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도멘 미쉘 르부르정의 포마르 '라 바슈(La Vache)' 포도밭.[사진=도멘 미쉘 르부르정]

포마르는 부르고뉴 안에서도 까다로운 지역이다. 코트 드 본(Cote de Beaune)의 남단, 본(Beaune) 바로 아래에 위치하지만 와인의 성격은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부르고뉴를 단순화하면 흔히 코트 드 뉘(Cote de Nuit)는 '구조', 코트 드 본은 '균형'으로 설명된다. 코트 드 뉘의 피노 누아(Pinot Noir)는 '직선적인 긴장'을 갖고, 코트 드 본의 피노 누아는 상대적으로 더 밝고 접근성이 좋다는 식이다.


하지만 포마르는 이 구분에서 늘 미끄러진다. 구조는 강한데 과시적이지 않고, 질감은 단단한데 거칠지 않다. 젊을 때는 닫혀 있고,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균형이 드러난다. 그래서 포마르는 '좋다 혹은 나쁘다'는 잣대보다 '빠르다 혹은 늦다'는 기준으로 차이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이는 포마르 지역이 석회암 위에 점토가 두텁게 얹힌 구조를 가진 데서 기인한다. 석회암이 산도의 뼈대를 만들고, 점토가 과실을 단단히 눌러 담는다. 이 조합은 향을 크게 확산시키기보다 와인의 하부를 고정시킨다. 그래서 포마르의 와인은 잔 안에서 곧바로 퍼지지 않는다. 입안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시간이 지나며 층을 드러낸다. 르부르정은 이런 성격을 완화하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그저 포마르가 가진 '느린 리듬'을 그대로 따른다. 이로 인해 르부르정의 와인은 젊을 때는 절제되고 무뚝뚝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절제는 결핍이 아니라 구조가 먼저 형성되는 과정에 가깝다.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베레종(Veraison) 단계의 피노 누아.[사진=도멘 미쉘 르부르정]

하지만 포마르의 와인이 하나의 얼굴이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 마을 안에서도 밭의 위치와 토양의 밀도, 배수와 노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르부르정이 포마르를 한 가지 맛으로 만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르부르정이 보유한 포마르의 주요 구획은 '라 루아 오(La Rue au)', '레 푸아소(Les Poisots)', '라 바슈(La Vache)'다. 같은 마을 안에 있지만 토양의 밀도와 배수, 미세한 경사에서 차이가 난다. 특히 라 바슈는 도멘의 핵심 밭으로, 포마르 특유의 구조와 깊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차이를 집약한 와인이 '포마르 레 트와 테루와(Domaine Michel Rebourgeon Pommard Les Trois Terroirs)'다. 세 구획의 포도를 블렌딩했지만 구획 별 개성은 지워지지 않는다. 각 밭의 긴장감이 하나의 중심으로 모이며, 포마르라는 지역이 단일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르부르정의 선택은 이같은 차이를 강조하기보다 차이가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와인은 꽃잎을 한 움큼 쥔 듯한 플로럴 노트가 퍼지고, 체리를 중심으로 한 붉은 베리 향이 뒤따른다. 여기까지는 섬세한 부르고뉴처럼 보이지만 입안에선 다시 포마르의 구조가 드러난다. 정제된 타닌이 중심을 잡고, 과실은 그 구조 위에서 과장 없이 밀도를 쌓는다. 산도는 피니시를 길게 끌어가며, 이 와인이 단순히 '향 좋은 블렌딩'이 아니라 포마르를 구조로 정리한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도멘 미쉘 르부르정 포마르 트와 테루와(Domaine Michel Rebourgeon Pommard Trois Terroirs)'
르부르정의 기준점이 되는 와인들

부르고뉴에서 엔트리급 와인은 도멘의 기본기를 보여주는 자리다. 생산자의 와인 제조 방향과 철학이 솔직하게 남는다. 도멘 미쉘 르부르정의 '부르고뉴 코트 도르 루즈(Domaine Michel Rebourgeon Bourgogne Cote d'Or Rouge)'도 마찬가지다. 이 와인은 손 수확한 포도의 줄기를 제거한 뒤 스테인리스 탱크와 콘크리트 통에서 발효하고 12개월간 오크 숙성해 만든다. 스테인리스는 과실의 선명함을 유지하고, 콘크리트는 발효 과정의 질감과 온도 안정성을 도와 구조를 정돈한다. 오크 숙성은 인상을 만들기보다는 산도와 타닌의 결을 정리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때문에 이 와인은 향이 튀지 않는다. 대신 잘 익은 체리와 레드 커런트의 과실이 중심을 이루고, 흙 내음과 오크의 뉘앙스가 과실을 감싸며 전체를 단단하게 만든다. 포마르 테루아에서 비롯된 바디감과 숙성된 라즈베리 풍미가 입안을 채우는데, 이때 인상적인 것은 균형이다. 밝은 과실이 먼저 나서지 않고, 구조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엔트리급임에도 가볍게 흘러가지 않는 이유다.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발효 단계를 거치고 있는 피노 누아[사진=도멘 미쉘 르부르정]

'포마르(Domaine Michel Rebourgeon Pommard)'는 르부르정의 기준점이다. 이 와인을 마시면 르부르정이 포마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외관에선 짙은 체리 색에 보랏빛 루비 색조가 가장자리에 옅게 나타나는 매우 아름다운 색이 돋보인다. 코에선 딸기와 레드 커런트, 블루베리 같은 베리류 아로마가 층을 이루고, 페퍼와 시나몬의 스파이스가 따라온다. 향의 구성 자체는 피노 누아의 전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와인의 '포마르다움'은 향보다 입안에서 드러난다. 벨벳을 연상시키는 정제된 타닌이 먼저 구조를 잡고, 미디엄 풀 바디의 무게가 그 위를 채운다. 산도는 과실을 들어 올리기보다 구조를 끝까지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와인은 젊을 때 강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강한 인상이 정렬된 구조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포마르가 오랫동안 오해받은 지점을 이 와인은 정확히 보여준다.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도멘 미쉘 르부르정 포마르(Domaine Michel Rebourgeon Pommard)'

'포마르 레 노종(Domaine Michel Rebourgeon Pommard Les Noisons)'은 르부르정의 심화 버전이다. 0.3헥타르 규모의 작은 구획, 1939년 식재된 올드 바인, 단 3개 배럴 생산. 이 조건 자체가 와인의 성격을 설명한다. 포마르는 원래 구조가 강한 지역이지만 올드 바인(Old Vines)과 소량 생산은 그 구조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든다.


향에선 라즈베리를 기반으로 한 베리류 아로마가 먼저 올라오고, 스파이스가 층층이 더해진다. 입에서는 옅은 생강 뉘앙스와 흙의 인상이 함께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요소들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와인은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한 모금 한 모금이 쌓이며 깊이가 만들어진다. 산도와 잘 익은 타닌이 균형을 이루고, 피니시는 길게 이어진다. 포마르가 '시간을 요구하는 지역'이라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의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가 이런 와인에서 나온다.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120년가량 된 도멘 미쉘 르부르정의 올드 바인[사진=도멘 미쉘 르부르정]
사람은 뒤에 남는다…테루아를 앞세운 양조

현재 도멘 미쉘 르부르정의 양조는 소유주인 델핀과 스티브의 아들 윌리엄 화이트헤드(William Whitehead)가 담당하고 있다. 그는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양조를 시작해 빠르게 업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르부르정의 와인에서 와인메이커의 존재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포마르가 가진 구조와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그대로 유지한다. 이곳에선 테루아가 중심이고, 사람은 이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역할에 가깝다. 그는 과실을 과장하지 않고, 오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구조가 스스로 자리를 잡도록 기다린다. 개입은 최소화하지만 판단은 정확하다. 이 절제된 태도는 포마르라는 지역과 잘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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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멘 미쉘 르부르정을 한 번 이해하면 포마르를 다시 보게 만든다. 포마르라는 지역의 성격을 누구보다 정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르고뉴에는 수많은 피노 누아가 있고, 대부분은 '섬세함'이라는 단어로 쉽게 요약된다. 그러나 르부르정이 보여주는 포마르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섬세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섬세함을 드러내는 순서가 다르다. 먼저 구조가 형성되고, 그 위에 과실이 놓이며, 마지막에야 균형이 드러난다. 그래서 르부르정의 와인은 잔의 초반보다 중반이 더 중요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중요하다. 포마르의 중심에서 가장 느리게 남는 피노 누아. 도멘 미셸 르부르정은 그 느린 축적의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아경와인셀라]"첫 모금보다 황홀한 마지막"… 포마르의 느린 피노 누아 도멘 미쉘 르부르정의 포도밭 전경.[사진=도멘 미쉘 르부르정]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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