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산업 경쟁 가속…AI 투자 규모 커지는데
국내에선 금산분리·자사주·중복상장 등 규제
SK하이닉스가 미국 주식예탁증서(ADR·American Depositary Receipt) 상장 검토에 나서면서 국내 기업의 자금조달 환경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산업 투자 규모가 커지는 상황에서 금산분리와 자사주 소각 의무화, 중복상장 규제 등이 겹치며 기업들이 국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본 수단이 좁아졌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1일 산업·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전날 조회공시 답변을 통해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나 현재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이어 "추후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는 시점 또는 1개월 이내에 재공시하겠다"고 덧붙였다. 약 1740만주의 자사주가 활용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으나 회사는 검토 단계라는 점을 강조했다. 국내 저평가 문제와 해외 투자자 기반 확대를 동시에 고려한 조치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번 조회공시는 앞서 SK하이닉스가 자사주를 미국 증시에 주식예탁증서로 상장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온 데 따른 것이다. 예탁증서(DR)는 기업 주식을 해외 시장에서 유통하기 위해 발행하는 대체증권이다. 기업이 원주식을 국내 보관기관에 맡기면 이를 담보로 현지 은행 등 해외 예탁기관이 예탁증서를 발행하고 해외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도록 한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경우 ADR이라고 부른다. 업계에선 미국 시장에서 ADR이 거래되면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론과 같은 경쟁사 수준으로 기업 가치를 재평가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계에선 SK하이닉스의 ADR 상장 검토를 단일 기업의 선택이 아니라 국내 자본시장 구조의 한계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한다. 국내에서 계열사 상장이 제한되고 자사주 활용도 제약받는 동안 미국 시장은 적극적으로 첨단산업 기업 유치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국내보다 미국에서 더 높은 가치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기대도 내놓는다. 무엇보다 미국은 AI·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자 관심이 높아 ADR 발행이 기업 가치 제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첨단산업 경쟁이 가속화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자본시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를 넓혀주는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배경이다.
SK하이닉스는 기업 단독으로 대규모 투자에 필요한 자금과 인프라 확보가 어렵다며 제도 개선 필요성을 정부에 전달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는 대통령실 보고회에서 "대규모 자금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며 초대형 투자가 단일 기업에 집중되는 구조의 한계를 지적했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약 600조원을 단계적으로 투입해 팹 규모를 확대하고 첨단장비를 도입할 계획이며 청주에도 향후 4년간 42조원 투자를 예고했다.
이 같은 흐름은 지주사 규제와 금산분리 규제에 막힌 기업들의 자본 유연성이 크게 제한된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관계 부처는 지주사 규제와 금산분리 원칙 일부를 조정하는 방안을 이르면 이번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략산업 투자 규모가 커진 상황에서 기존 규제 환경으로는 대규모 사업 확장에 필요한 자금 공급이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지주회사의 손자회사가 국내 증손회사를 두려면 지분을 100% 보유해야 하는 현행 규정을 '50% 이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100% 규정은 총수 일가의 과도한 지배력 확대를 견제하는 장치지만 첨단산업 투자에선 신규 자회사 설립 비용이 과도해 사업 확장에 걸림돌이 됐다. SK하이닉스·LG에너지솔루션 등이 이 규정의 영향을 받는 대표 사례다.
일반지주회사의 금융리스 회사 보유를 허용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금산분리 원칙이 적용되는 현행 체계에선 일반지주회사가 금융·보험업을 영위할 수 없지만 금융리스가 허용되면 설비·시설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초기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특수목적법인(SPC)을 활용해 투자자를 유치하는 방식도 가능해져 첨단산업 자금조달 방식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국내 규제가 투자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됐다. 글로벌 기술 기업들의 투자 규모는 국내 기업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준으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포스는 구글·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AI 기업의 내년도 자본지출을 5200억달러(약 764조원)로 전망했다. 반도체 팹 건설 비용도 한 기당 100조원을 넘길 것으로 관측된다.
그런데도 국내에선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이어지고 금산분리·중복상장 규제 등으로 전략적 자본 활용 수단이 제약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서 기업 62.5%가 자사주 소각 의무화에 반대했고 79.8%는 신규 취득 자사주 처분 공정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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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기업 관계자는 "현행 제도에서 수십조원대 투자를 반복해야 하는 첨단산업 시대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성장할수록 규제가 커지는 구조"라고 평가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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