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문학의 큰 산맥 박경리 작가(1926~2008)의 대하소설 '토지'의 시작과 끝은 '8·15'로 연결돼 있다. '1897년의 한가위(음력 8월15일)'로 문을 연 '토지'는 1945년 8월15일, 광복의 감격을 긴 여운으로 그려내며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작가가 25년에 걸쳐 필생의 역작으로 집필한 이 소설의 완간 일도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였다. 작가가 '토지'를 완성한 원주시 단구동 옛집에 조성한 박경리문학공원과 원주시는 8월15일을 소설 '토지의 날'로 제정, 기념하고 있다.
1897년 조선말의 '8·15'. 박경리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자의 수탈로 가장 풍요로운 계절에 굶주려 죽어간 민초들의 삶에 연민했다. '8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쌉쌀한 한산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 될 수 있을는지.'(1부 제1편 어둠의 발소리)
'토지'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출발해 한반도와 만주 간도까지 광활한 무대를 오가면서 '8·15 광복'을 맞기까지 수난의 역사를 헤쳐나간 민초들의 삶과 생명력을 그려냈다. 총 5부 20권, 200자 원고지 분량 4만여장에 등장인물만 600여명이다. 소설로 쓴 민족 근대사의 대서사로 평가받는 이유다. 1969년 박경리의 나이 44세에 집필을 시작해 25년 만인 1994년 69세에 완간했다. 고향과 인연, 세속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 수를 놓듯 한땀 한땀 창작에만 매달렸다. 세계 문단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치열한 작가정신의 표상이다. 작가는 왜 이토록 '토지'에 천착했을까.
박경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긴 유고 시 '옛날의 그 집'에서 말한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사마천이 누구인가. 중국 한(漢) 무제 시대 역적으로 몰려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궁형(거세)을 선택해 위대한 역사서 사기(史記)를 남겼다. 박경리는 사마천의 삶을 연민하며 글을 썼다. 살아야 한다고, 글로 써서 이겨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는 암 수술을 받고도 퇴원하자마자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집필을 계속했다. 그는 '토지' 완간 기념 소감문에서 "내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듯이 아픈 가족사의 칼날도 견뎌냈다.
'토지'는 사상과 지식보다는 민초들의 일상사가 올올히 담겨 있다.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 질곡의 한국 근대사 속에서 민초들의 나라를 잃은 슬픔과 고통을 잊지 말 것을 되새기게 한다. 박경리는 토지를 문서로 보았다. 땅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땅은 토지라기보다 대지에 가깝다. 땅에 금을 긋고 인간이 소유를 주장할 때 대지는 토지로 변한다. 그래서 '토지'는 소유와 욕망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민초들의 한(恨)과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의 작가 조세희는 생전 "거대한 중화학 공장 몇백 개보다 박경리 선배의 '토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며 "세금으로도 생산해낼 수 없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토지'가 올려준 것은 우리 정신의 GNP(국민총생산)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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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박경리 작가가 광복 8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이다. 사반세기 동안 세속과 거리를 두고 지독한 고독 속에서 단 하나의 작품, 단 하나의 주제를 붙잡고 끊임없이 완성도를 추구한 것은 세계 문단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박경리의 '광복의 빛'을 향한 집념과 '토지' 속 민초들의 거친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둠을 견디는 참음의 길을 인도하고 있다.
조영철 팀장 yccho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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