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의 이유있는 미국行, 노조도 못말리는 까닭은

[현대차 오버 더 모빌리티](17)
미국에 사활 건 현대차그룹
현대차·기아, 美생산 능력 70% 확대
글로벌 판매 3대 중 1대는 북미서 팔려
美 중요성 부각…경쟁력 확보 필요 '공감대'
미국 전문가 경영진 영입…드림팀 구성

편집자주[현대차, 오버 더 모빌리티]는 현대자동차그룹이 글로벌 3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혁신 비결을 정리한 콘텐츠입니다. 예로부터 자동차 산업을 주도한 국가가 글로벌 경제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제조업의 꽃인 자동차 산업은 기술 발전과 수출, 고용의 측면에서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과거 현대차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였다면 이제는 산업을 이끄는 선두 주자(first mover)로 부상했습니다. 글로벌 취재 현장에서 느낀 현대차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주소를 그대로 전달해드립니다. 연재는 40회 이후 서적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경쟁사는 미국에서 만들어 싸게 파는데 우리만 한국 생산을 고집하다간 경쟁에 밀려 시장 점유율이 크게 떨어질 수 있어요. 수출 길이 아예 막혀버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노조도 아는 거죠."

현대차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정부가 수입 완성차에 고율 관세 부과를 선언하자 현대차그룹은 미국 생산 확대 계획을 내놨다. 2024년 10월 미국 조지아주에서 가동한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의 생산능력을 20만대 추가한 50만대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를 통해 현대차·기아의 미국 내 총생산 능력을 현재 70만대 수준에서 120만대까지 늘린다는 구상이다. 생산 능력의 70%를 확대한다는 파격적인 발표에도 현대차 노동조합은 이상하리만치 잠잠하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해외 생산 확대 혹은 수출 차종의 생산지 이관 등 아이디어 차원의 이야기만 나와도 현대차 노조는 결사 항전의 의지를 밝히곤 했다.

2021년 현대차는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팰리세이드의 미국 생산을 늘리고자 시도했다. 노조는 '해외 신차 배정 등 공장별 물량 조절을 위해서는 노사공동위원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단체협약 조항을 이유로 미국 공장에서 증산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최종적으로 미국 생산은 무산되고 국내 공장에서 팰리세이드 생산 라인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이 최근 미국에 4년간 31조원을 쏟아부으며 현지 생산을 늘리겠다는 구상을 발표했음에도 노조는 예상과 달리 조용하다. 현대차그룹이 미국 시장에 사활을 걸었으며 미국에서의 성공은 기업의 생사와도 직결된다는 사실을 노조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과거처럼 해외 공장과 밥그릇 싸움을 하다간 공멸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 노조는 이번 관세 영향을 차종별로 분석하고 있다. 노조가 관세 영향으로 국내 생산 감소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현대차의 차종은 전체 16종 중 13종이다. 이는 기존 국내 생산 차종만 집계한 것으로 앞으로 나올 신차는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 현대차그룹이 HMGMA 생산능력을 30만대에서 50만대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힌 만큼 향후 출시될 전기차, 하이브리드 등 미국을 겨냥한 신차는 현지 생산 가능성이 커졌다. 2024년 2월 출시된 플래그십 전기 SUV 아이오닉9은 이미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HMGMA에서 생산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HMGMA에서 생산된 아이오닉 5 차량에 기념 서명을 하고 있는 모습. 현대차그룹 제공

현대차·기아 3대 중 1대가 북미서 팔렸다

현대차·기아가 미국 시장이 사활을 건 이유는 뭘까. 그만큼 북미 시장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2024년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된 현대차·기아 차량 3대 중 1대는 북미에서 팔렸다. 판매 대수로 보면 북미 판매량이 218만대로 한국 판매량(125만대)보다도 많다. 권역별 시장 규모로 봐도 북미 비중(31%)이 가장 높다.

과거 현대차·기아가 신흥 시장 중국을 중심으로 '박리다매(薄利多賣)' 방식을 취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늘려왔다면 2020년대 이후에는 선진 시장 미국을 중심으로 SUV와 친환경차를 앞세워 판매 대수를 끌어 올리고 있다. 특히 미국 소비자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대형차, SUV를 선호한다. 따라서 미국 판매가 늘면 늘수록 현대차·기아의 수익성도 가파르게 개선되고 있다. 지난해 기준 현대차의 해외 시장 SUV 평균 판매가격이 7000만원, 기아가 6000만원을 넘어선 것도 미국에서 판매 확대가 주효했다.

현대차·기아의 전체 글로벌 판매량은 800만대 이상으로 정점을 찍었던 2015년보다 낮아졌지만(2024년 기준 720만대) 대신 2022년부터 현대차·기아는 3년 연속 사상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 기록을 갈아치웠다. 양보다는 질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성장 전략이 바뀐 영향이다. 선진 시장인 미국에서 제품력과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전 세계 시장에서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는 효과도 누렸다.

이는 해외에서 각종 상을 휩쓸고 있다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기아 EV3가 2025년 '세계 올해의 차(World Car of the Year)'를 수상하면서 최근 6년간 5차례의 세계 올해의 차를 석권했으며 영국·핀란드·덴마크에서 올해의 차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현대차그룹은 미국 시장 조사 업체 제이디파워(J.D.Power)가 발표한 내구품질조사에서 2년 연속 1위(2022~2023년)를 달성했으며 제네시스는 신차품질조사에서 프리미엄 브랜드 1위(2021년)를 기록했다.

수상 실적은 다시 현대차·기아의 미국 판매 확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실용적인 미국 소비자들은 무엇보다 제품력 위주로 차량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공신력 있는 기관의 객관적인 평가 결과는 미국 소비자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수단이 된다. 지성원 현대차 브랜드마케팅 본부장은 "마케팅 업계에서는 '미국은 제품을 사고 유럽은 브랜드를, 중국은 혁신을 산다'는 말이 있다"며 "미국 시장에서는 개별 차종의 수상 결과나 실질적인 소비자 혜택, 짧은 충전 시간 등 제품력과 실용적인 부분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타이거 우즈 살린 제네시스, 이방카 옆에 서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타이거 우즈가 사고를 당했어요."

장재훈 부회장은 현대차 대표이사 재직 시절인 2021년 2월 정의선 회장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장 부회장은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 타이거 우즈가 제네시스의 대형 SUV GV80을 타고 가다가 전복 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을 긴급 보고했다. 제네시스는 물론, 현대차그룹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타이거 우즈는 제네시스가 후원하는 골프 대회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의 호스트로 LA에 머물던 중 제네시스가 제공한 GV80을 타고 개인 일정을 위해 이동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우즈가 탄 차는 과속 상태에서 커브 구간에 진입했고 도로의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은 후 몇 바퀴를 굴러 길가 숲으로 떨어졌다. 차량이 심각하게 파손될 정도의 큰 사고였으나 우즈는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사고 소식을 접한 순간 제네시스 측에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사고의 원인이 차량의 기계적 결함으로 나온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제네시스는 물론, 현대차·기아의 안전성까지 모조리 의심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사고의 당사자는 전 세계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타이거 우즈였다.

타이거 우즈(사진 오른쪽)가 2023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 우승자 존 람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제네시스 제공

사고 조사 결과가 나오자 상황은 반전됐다. 사고의 주된 원인이 과속이었고 차량 결함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제네시스는 안전성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현지 언론과 대중은 '제네시스가 우즈의 생명을 구했다'며 일제히 찬사를 보냈다. 우즈 역시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걷게 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평했다. 현대차그룹은 이 사고와 관련해 어떠한 공식 입장을 내놓거나 별도의 기술적 설명을 한 적이 없다. 당시 현대차 내부에서도 '사고를 어떠한 마케팅의 도구로 삼지 말라'며 오히려 함구령을 내렸다는 후문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타이거 우즈의 사고는 제네시스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제네시스가 독립 브랜드로서 미국 시장에 2016년 론칭한 이후 가장 가파른 성장을 보였던 해가 바로 2021년이다. 직전 해인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영향으로 미국 신차 시장의 판매가 위축되면서 20%가량 판매가 줄었다. 이듬해인 2021년에는 200%가 넘는 성장을 보이며 판매량이 연간 1만6000대에서 5만대 수준으로 크게 늘었다. 업계에서는 제네시스의 이 같은 비약적인 성장의 배경에 '타이거 우즈' 효과가 있었다고 해석한다.

최근 제네시스는 미국 사회 최고 고위층과 연계한 간접 광고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꾀하고 있다. 2025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트럼프의 영상에서 제네시스의 GV80이 함께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방카 트럼프 가족이 공군 수송기를 타는 장면에서 제네시스 GV80이 보란 듯이 공항 활주로에 세워져 있었다. 현대차그룹은 의전을 위해 이 차량을 제네시스 측에서 제공했는지 또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는지 등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보안이 삼엄한 트럼프 일가의 의전 차량을 정하는 일에서 '우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2025년부터 대외전략을 총괄하며 현대차그룹에 본격 합류한 성 김 사장(전 주한미국대사)의 주도 아래 이뤄졌다는 평가다.

통상 격랑 속 현대차 묘안은

트럼프 2기 정부의 자동차 관세 정책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자동차를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미국에 유리한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고율 관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관세 정책의 목표 자체는 자국 산업의 보호에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쪽은 미국 완성차 업체와 미국 경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트럼프 정부의 속도 조절이 불가피하며 정책 불확실성은 여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필자는 이 같은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의 상대적인 경쟁력은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미국 정부의 정책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함'은 현대차그룹의 가장 큰 강점이다.

트럼프 2기 정부는 기후변화 위기 대응을 위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조 바이든 정부에서 지원했던 전기차 보조금이나 친환경 에너지 투자 세액 공제 등을 축소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지었던 HMGMA에서 하이브리드를 병행 생산하겠다고 방향을 틀었다. 정책 변화 상황을 보며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전기차 등 다양한 차종의 조합을 통해 가동률을 조절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에 더해 정책 대응과 영업 전략을 위한 '드림팀'도 구성했다. 북미 영업 전문가인 호세 무뇨스 사장을 현대차의 대표이사로 선임했으며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성김 사장을 대외전략 총괄로 영입했다. 무뇨스 대표는 닛산에서 15년 넘게 북미 영업을 이끌어 온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직접적 경쟁자인 일본 완성차 업체들의 전략에도 정통한 인물이다. 성 김 사장은 미국 외교관 출신으로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 양쪽 모두에서 중용된 초당적 인사로 평가받는다.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전경. 현대차그룹 제공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