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오버 더 모빌리티](7-2)
한전 부지 인수·지배구조 개편 실패 계기
시장 소통 강화한 현대차그룹
자본시장 출신 인사 적극 영입
대기업 중 거버넌스 가장 긍정적 평가
지배구조 개편 등 과제 남아
2014년 현대차그룹은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부지 입찰의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 낙찰 가격은 무려 10조5500억원. 부지 감정가격의 3배에 달하는 그야말로 ‘통 큰 투자’였다. 현대차그룹은 이곳에 정몽구 명예회장의 숙원 사업인 통합 그룹 사옥을 건설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동시에 삼성동 일대를 대한민국 랜드마크로 개발하고 스마트 시티를 표방하는 혁신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현대차그룹의 낙찰 가격이 부지 감정가를 크게 웃도는 데다 경쟁자인 삼성이 써낸 입찰가격(5조원대 초반)보다도 두 배 이상 비쌌기 때문이다. 당시 외국인 투자자들은 IR 담당자와 국내 애널리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현대차가 한국전력을 사서 전력 사업에 진출하는 거냐"고 물었다. "아니다. 땅값만 10조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이들은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분노의 기관 투매가 시작됐다. 현대차그룹은 한전부지 인수를 위해 10조5500억원의 현금을 썼지만 시장의 신뢰를 잃은 대가로 그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낙찰 결정 이후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 등 주요 계열사의 시가 총액이 일주일 만에 11조원 이상 증발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8년.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했다. 정부와 시장이 오랫동안 지적해온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였다. 고민 끝에 현대모비스를 투자·핵심부품 사업과 모듈·AS 사업으로 나누고 캐시카우인 현대모비스 모듈·AS 사업을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내용의 개편안을 내놨다. 이 계획에 대해 정부도 ‘오케이 사인’을 줬지만 시장이 반대했다. 시장은 분할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합병비율이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당시 제시한 합병비율은 0.61대 1. 기관 투자자들은 이 비율이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높은 현대글로비스 주주에게 유리하고 현대모비스 주주에겐 불리하다며 반기를 들었다. 정의선 회장이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해외투자자 설득까지 시도했지만 시장의 반대 입장은 견고했다. 결국 현대차그룹은 두 달 만에 개편안 추진을 철회하게 된다.
두 사건은 현대차그룹의 시장과의 소통 방식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과거엔 일방적인 의사결정 이후 시장에 통보하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항상 시장의 반응을 살피고 소통하게 됐다. 2018년 이후 현대차는 현직 애널리스트를 IR 담당자로 임명하고 자본시장 출신 사외이사를 적극 영입했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주주 친화적인 인물을 영입해 시장과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서다.
2025년 기준 현대차의 이사회 구성(3월 주주총회 이후 기준)은 사내이사 5인, 사외이사 7인이다. 이 중 3분의 1이 여성(4명)이고 외국인 2명, 금융시장 출신 전문가 2명이 포진됐다. 특히 새로운 이사회 구성에서는 글로벌 금융투자업계의 큰손인 연기금 출신 인사 2명이 충원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김수이 전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글로벌 PE 대표는 세계 10대 연기금 중 하나인 CPPIB의 시니어 매니징 디렉터 출신이다. 글로벌 PE업계에서 한국인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또 다른 사외이사 후보인 벤자민 탄 싱가포르투자청(GIC) 매니저는 세계적인 연기금인 GIC에서 아시아 지역 포트폴리오 관리를 담당해왔다. 이들은 풍부한 글로벌 자본시장 경험과 네트워크를 살려 글로벌 시장 투자자와 소통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의 주주권익 보호 사외이사는 수시로 거버넌스 기업설명회(NDR)를 개최하고 국내외 투자자들을 만난다. 2024년 8월에는 총주주환원율(TSR) 35%를 달성하겠다는 밸류업 정책도 내놨다. 이 밸류업 정책에 대해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A-’학점을 부여했다. 거버넌스 포럼은 기업 거버넌스 개선을 통해 자본시장 선진화를 추구하는 비영리단체다. 기관투자자부터 학계, 변호사, 회계사, 금융전문가들이 참여해 기업 거버넌스에 대한 점수를 매긴다. 포럼이 현대차에 삼성동 부지와 KT 보유지분 등 유휴자산 매각을 요구하긴 했지만, 현대차가 받은 A-학점은 ㈜SK D학점, LG전자 D학점, SK하이닉스 C학점 등 대기업 평균보단 높은 편이다.
시장에서 보는 현대차그룹 거버넌스에 대한 총평은 어떠한지. 현대차그룹에 정통한 자본시장 관계자 4인(▲고태봉 iM증권 리서치본부장(이하 고)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위원(이하 임) ▲가치투자펀드운용사 대표(이하 가) ▲행동주의펀드운용사 대표(이하 행))을 각자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를 좌담회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A. 시장에서 보는 현대차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 행: 주주가치 제고의 측면에서 보면 국내 대기업 중에서는 가장 낫다고 생각한다. 보통 시장에서는 대부분의 대기업에 대해 (주주가치 제고 측면에서) 부정적인 뷰를 가지고 있는데 현대차에 대해서는 그나마 긍정적인 편이다. 적어도 대놓고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물적 분할, 동시 상장 등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특히 2018년 엘리엇의 문제 제기 이후에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다. 최근 현대차증권의 대규모 유상증자, 현대차 인도법인의 구주매출 상장 등 크고 작은 논란거리는 있었지만 100% 완벽한 기업은 없지 않겠나.
▲ 고: 예전과 비교하면 현대차의 이미지나 위상은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현대차는 자체 엔진 기술을 내재화한 사실상 마지막 글로벌 완성차 업체다. 트렌드를 파악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로서의 열정과 패기가 있다. 다만 최근 시장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자율주행 분야에서 약간의 보틀넥(bottleneck·병목 현상)이 있다. 엔진 개발을 위한 기계공학 분야는 개발 당시에도 기반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던 상황이지만, AI 시대를 대비하기에 아직 소프트웨어 기술에서는 우리가 기반이 너무 없다는 점에서 걱정이다.
A. 기업 총수(경영자)에 대한 평가는?
▲ 행: 기업인을 평가하는 핵심은 성장과 분배라고 생각한다. 기업의 비전을 얼마나 잘 제시하고 성과를 얼마나 공정하게 배분하는 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의선 회장은 그래도 재벌 총수 중에선 가장 낫다. 본인이 리스크를 지고 대외적으로 나서는 경영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시장의 피드백을 받아 소통하려고 하지 않나. 그래도 국내 패밀리 비즈니스 중에서는 가장 모범사례로 본다. 보통 대기업에 대한 시장의 분위기가 부정적 인식이 90, 긍정이 10이라면 그나마 현대차에 대해서는 50대 50이다. 한국의 실질적인 독점사업자로서 국민과 주주의 희생과 도움을 받아 글로벌 3위까지 갔다는 건, 그래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할 일은 다 했다고 본다.
▲ 가: 여의도에서 정 회장에 대한 평가는 좋다. 이미 지나간 실적이라고 해도 지난 3년간 현대차가 전통 완성차 업체 중에 가장 잘한 건 사실이다. GM이나 폭스바겐 등 전 세계 완성차 회사를 통틀어 가장 좋고 빠른 의사 결정을 했기에 그 점에서는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다만 중국차가 너무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현대차가 밀린다는 지적도 있다. 산업의 변화가 지나치게 빠른 바람에 오히려 정 회장의 경영 능력이 평가 절하되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A. 한전 부지 인수, 보스턴다이내믹스와 모셔널, 포티투닷 투자 등 현대차그룹의 투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투자 방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
▲ 행: 2014년 한전부지 인수 당시 "차라리 그 돈으로 애스턴 마틴을 사라" 혹은 "연구개발(R&D)에 투자해라"라는 말도 많았다. 당시엔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이었는데 지금 지나고 보니 토지 가치만 3~4배 오른 것 아닌가. 개인적으론 현대차그룹이 대한민국의 센트럴 파크를 샀다고 생각한다. 보스턴다이내믹스 같은 경우도 인수 당시에는 논란이 있었는데 지금 비상장 주식 지분 가치가 10배 가까이 올랐고 상장도 고려한다고 들었다.
▲ 고: 보스턴다이내믹스, 모셔널 등 신기술을 위한 굵직한 투자는 잘해왔다고 본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AI 시대에 대비한 데이터센터 투자다. 이미 그룹사 차원의 데이터센터가 있지만 AI 기술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조단위의 대규모 투자가 수반돼야 한다. 한국 영토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리얼 데이터를 활용하고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 센터가 절실한 상황이다.
1년에 현대차·기아가 국내 시장에 판매하는 신차가 120만대 정도다. 이는 대한민국 자동차 누적 등록 대수의 20분의 1 정도는 된다. 여기다 새롭게 자율주행 시스템을 장착해 데이터를 모은다고 가정해 보자.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자국 내수 점유율이 70% 이상인 완성차 브랜드는 현대차·기아밖엔 없다. 한국은 휴전 국가이자 좁은 땅덩어리에 빽빽하게 모여 사는 나라다. 한국의 곳곳을 다니면서 모은 데이터는 한국에서 관리하고 개발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A. 그밖에 현대차그룹 거버넌스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나?
▲ 행: 현대차와 기아의 자원배분의 문제다. 똑같은 완성차 사업을 영위하는 현대차와 기아가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데 인재 영입이나 특허, 자산 배분 등의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하다. 특히 연구개발(R&D)의 경우 같이 비용을 분담하고 상각도 함께하는 구조일 것이다. 그에 대한 비율이나 의사 결정이 그룹사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궁금하다. 이를 통해 두 회사의 차별화 포인트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도 확실히 알려줬으면 좋겠다.
A. 현대차그룹이 본격적으로 주주가치 제고를 신경 쓰게 된 계기는 2018년 지배구조 개편의 실패가 아닐까 싶다. 향후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 대해서는 어떻게 예상하나?
▲ 가: 2018년 개편 무산 이후에는 어떠한 조짐도 없이 불확실성으로만 남아있다. 사실 현세대(3세)에서는 지금의 구조가 최적이다. 정 회장이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4세 경영까지 생각하지 않으면 굳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홀딩스 체제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본다. 차세대 경영권 확보를 위해 지배구조 개편을 할 수는 있지만, 삼성처럼 4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 하면 지금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자녀들에게 (경영권 상속의) 선택권을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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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현시점에서 무리해서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하기보다는 명예회장이 고령인 점을 감안할 때 상속으로 가지 않겠나 보고 있다. 상속으로 주요 계열사의 지분율이 낮아지더라도 순환출자 고리 밖에 있는 계열사의 지분을 매각해 재원으로 활용하는 등 여러 방법이 있다.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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