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미국 '슈램스버그(Schramsberg)'
미국 최초의 샴페인 방식 스파클링 생산자
냉전시대 美·中 관계 정상화의 상징
자타공인 미국 최정상 스파클링 와인
1972년 2월 21일 오전 7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은 괌을 떠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4시간의 비행 끝에 그가 발을 내디딘 곳은 중국 상하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에 방문한 닉슨은 8일간 베이징과 항저우, 상하이를 순방하며 마오쩌둥(毛澤東) 공산당 주석 등과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고, 이후 두 나라 정부는 양국 관계의 기초로 남아 있는 '상하이 공동성명(Sanghai Communique)'에 서명하며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정상화를 선언한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냉전 시대 미·중 관계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던 그가 공산 진영 지도자와 회동하고, 관계 개선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닉슨 중국에 가다(Nixon goes to China)"라는 표현은 특정 정치 지도자가 오랜 적대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관용 문구가 됐다.
닉슨은 중국 방문을 마무리하는 저우언라이(周恩?) 총리와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자국의 스파클링 와인을 들고 성과를 축하했다. 잔에 담긴 술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칼리스토가 지역의 '슈램스버그 블랑 드 블랑(Schramsberg Blanc de Blancs)' 1969년 빈티지였다. '평화를 위한 축배(Toast to Peace)'라는 이름으로 미·중 외교 역사에 남은 슈램스버그의 와인은 이후 46대 조 바이든까지 단 한명의 대통령도 빼놓지 않고 백악관 국빈 만찬에 빈번하게 사용되며 미국을 대표하는 스파클링 와인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당시 슈램스버그는 미국에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와이너리여서 화제를 모았는데,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도 닉슨이 만찬용으로 슈램스버그를 준비한 이야기를 '샴페인 트릿(Champagne Treat)'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뤘다. 워싱턴 포스트는 슈램스버그가 연간 생산량이 5000병 수준의 희소한 와인으로, 백악관은 이 와인을 만찬에 사용하기 위해 1300달러어치의 슈램스버그 와인 180병을 구매해 공군기로 서부에서 동부로 공수했다고 썼다.
![[아경와인셀라]신대륙 스파클링 와인의 효시…美中 친선의 징표](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5010914321783030_1736400736.jpg)
'미국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을 꿈꾸다
슈램스버그의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2년 독일 이민자 제이콥 슈램(Jacob Schram)은 캘리포니아 나파 카운티 북부의 다이아몬드 마운틴 지역에 정착해 정부로부터 200에이커(약 25만평) 규모의 부지를 매입하고, 2마일(약 3.2㎞)에 달하는 지하 셀러를 조성하며 와인 사업을 시작한다. 이후 와이너리는 1890년경 약 3만 상자의 와인을 생산하고 두 번째 지하 셀러를 건설할 정도로 번성하지만 1905년 제이콥이 세상을 떠나며 선장을 잃고 1912년 운영을 중단하게 된다.
50년이라는 시간 속에 묻혀 잊혀가던 와이너리를 다시 되살린 건 잭과 제이미 데이비스(Jack&Jamie Davies) 부부였다. 의미 있는 삶을 꿈꾸며 새로운 터전을 찾던 젊은 부부의 눈에 들어온 건 세인트 헬레나 지역 산기슭에 있는 낡은 와이너리 부지였다. 한때 웅장했던 정원과 지하 저장고를 품은 19세기 빅토리아 스타일의 맨션이었지만 그들이 처음 발견했을 당시에는 오랜 기간 방치돼 빛이 바래버린 와이너리였다. 하지만 부부는 그 안에 숨겨진 빛을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낡은 와이너리를 인수해 되살리기로 결심했고, 1965년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지금의 자리로 이주했다.
데이비스 부부는 야심가였다. 그저 그런 와인 생산자 중 하나가 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세계적인 수준의 와인 생산자가 되겠다는 일념 아래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최고급 스파클링 와인'을 목표로 했고, 자신들의 와인이 특별한 이들과 마시는 와인, 동시에 자신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와인이 되길 바랐다. 뚜렷한 비전 아래 그 해 말 부부는 첫 번째 와인을 만들어내는데, 미국에서 샤르도네(Chardonnay) 품종으로 만든 첫 번째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품질에 초점…美 스파클링의 초석 다져
슈램스버그의 설립과 함께 캘리포니아 스파클링 와인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이전까지 미국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은 대부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탄산가스 발효를 통해 2차 발효를 진행해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샤르마 방식(Charmat Method)'으로 만든 저렴한 거품 와인이었다. 하지만 데이비스 부부는 쉬운 길 대신 프랑스 샹파뉴 지역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인 '샴페인 방식(Methode Champenoise)'을 채택한다.
샴페인 방식은 다양한 스파클링 와인 양조법 가운데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기법이지만 그만큼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 샴페인 방식은 병 안에서 2차 발효를 통해 거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2차 발효는 블렌딩한 베이스 와인이 담긴 병에 '리퀴르 드 티라주(Liquer de Tirage)'라고 부르는 효모와 당분 혼합액을 첨가한 뒤 크라운 캡으로 마개를 닫는다. 이렇게 병입된 와인은 12~14도(℃) 정도의 저온 환경에서 몇 주에 걸쳐 2차 발효되며 탄산가스가 생성된다.
2차 발효가 끝나면 효모는 병 아래에 침전물로 남게 되는데 효모를 바로 제거하지 않고 와인과 함께 숙성시킨다. 숙성이 끝난 와인은 침전물을 제거하기 위한 리들링(Riddling) 작업을 진행하는데, 슈램스버그는 이 리들링 작업을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리들링을 통해 병목으로 모인 침전물은 염화칼슘 용액에 와인 병목만 담가 얼리고, 이후 마개를 열면 탄산가스 압력에 의해 얼린 침전물과 소량이 와인이 밖으로 배출된다. 이후 유출된 소량의 와인을 보충하면 최종 와인이 완성된다.
슈램스버그의 스파클링 와인이 캘리포니아의 다른 스파클링 와인과 차별화되는 점은 오크통 발효와 숙성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슈램스버그는 포도에서 짜낸 원액의 25~40%를 일반적인 스테인리스 탱크가 아닌 오크 배럴에서 발효해 풍부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을 이끌어내고, 보통 1~3년 숙성한 베이스 와인을 사용하는 캘리포니아 다른 와이너리와 다르게 최대 10년까지 숙성한 베이스 와인을 사용해 복합미와 세련미도 부여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 가운데 대표 제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바로 1965년 슈램스버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탄생한 블랑 드 블랑이다. 블랑 드 블랑은 미국에서 전통적 샴페인 양조 방식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와인이라는 영예로운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가에서 조달된 최적의 샤르도네를 100% 사용했고, 병 속에서 효모와 함께 2년간 숙성한 후에 출시된다. 자몽·망고·살구·레몬·백도의 밝고 상큼한 과실의 풍미와 함께 갓 구운 빵, 바닐라 크림 파이의 풍미도 느껴지며 강렬한 여운이 이어진다. 식전에 단독으로 즐기기에 좋고, 신선한 굴과 조개류, 게살 요리, 세비체 그리고 구운 흰살생선과도 잘 어울린다.
전통 잇는 혁신…격이 다른 스파클링의 배경
슈램스버그의 와인은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의 나파(Napa)와 멘도시노(Mendocino), 소노마(Sonoma), 마린(Marin) 등 4개 카운티의 다양한 기후의 포도밭에서 재배된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Pinot Noir) 품종으로 생산된다. 와인 메이커들은 78개 이상의 특정 포도밭과 172개 블록에서 포도를 수확해 매년 250개 이상의 베이스 와인을 만든다. 이후 최적의 블렌딩을 통해 매년 12~14종의 독특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어낸다.
이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와인이 '슈램스버그 제이 슈램 블랑(Schramsberg J. Schram Blancs)'이다. 제이콥 슈램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슈램스버그의 최고 등급 와인으로 1987년 빈티지로 첫선을 보인 후 미국적 개성과 현대적 우아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처음에는 제이 슈램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됐지만 2013년 빈티지부터 샤르도네 중심의 와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제이 슈램 블랑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제이 슈램 블랑은 슈램스버그의 포도밭 가운데 가장 추운 밭에서 자란 샤르도네를 주로 사용해 만들어진다. 베이스 와인의 약 35%는 배럴에서 발효되고, 8년간의 긴 병 숙성을 거친 후 비로소 출시되는데, 10년 이상 숙성이 가능하다. 살구와 구운 사과의 풍미가 특징인 첫 모금은 브리오슈와 따뜻한 복숭아 향기가 감돌고, 혀끝에선 부드럽고 밀도 있는 질감으로 이어진다. 이후 부드럽고 산뜻한 산도가 우아하고 긴 여운과 함께 선사하며 마무리된다.
처음 데이비스 부부가 슈램스버그를 구입할 때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오래된 집을 허물고 현대적인 건물을 세울 수도 있었고, 숲을 벌목해 포도밭을 확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보존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오래된 와인하우스를 고쳐 사용했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그뿐만 아니라 200에이커의 부지 중 대부분을 숲으로 두고 43에이커만을 포도밭으로 사용했다. 슈램스버그에서 보존은 항상 계획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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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 부부의 유산을 이제는 아들인 휴 데이비스(Hugh Davies)가 이어가고 있다. 포도밭에서 나고 자라 와인 양조의 명문인 UC데이비스(UC Davis)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2005년 슈램스버그의 대표에 올랐고, 현재 총괄 와인 메이커의 역할까지 맡고 있다. 그는 땅의 보존과 관리에 대한 확고한 실천을 바탕으로 '미국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 생산자'라는 자부심을 계승해 격이 다른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어가고 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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