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풍부한 K-원전 수주 기대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소형모듈원자로(SMR)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마침 구글, 아마존 등 미국의 빅테크(거대 기술 기업)들도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잇따라 SMR에 대한 선점에 나서고 있다. 대형 원전에 대한 풍부한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기업들이 SMR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고조되고 있다.
SMR이란?… 더 안전하고 활용 범위 넓어
SMR(Small modular Reactor)은 대형 원전 대비 출력을 낮춘 중소형, 모듈형 원자로를 말한다. 1000메가와트급(㎿) 이상인 경우를 대형 원전으로, 300㎿급 이하를 SMR로 분류한다. SMR은 대형 원전에 비해 설계가 단순하고 공장에서 사전 제작해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건설 기간 및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형 원전 1기를 짓는데 10년 이상이 걸리는 데 비해 SMR은 3년 이내에 건설을 마무리할 수 있다. 소형이기 때문에 대형원전에 비해 더욱 안전하고 발전용뿐 아니라 열 공급, 해수의 담수화, 수소 생산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핵연료인 우라늄235에 중성자를 부딪치면 핵분열이 일어나면서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원자력발전소는 이 에너지로 증기를 만든 후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원리를 이용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국제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가압경수로(PWR·Pressurized Water Reactor)형 원전은 원자로를 냉각하는 데 물(경수)을 사용한다. 이때 물의 끓는 점을 높이기 위해 압력을 가해주기 때문에 가압경수로형이라고 부른다. 가압경수로형 원전은 핵융합이 일어나는 노심, 원전의 출력을 조절하는 제어봉, 가압기, 증기발생기, 냉각 펌프, 냉각 파이프 등의 장비가 하나의 격납 건물 안에 있다. 격납 건물 외부에 있는 터빈과 발전기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SMR은 대형원전의 격납건물에 있는 장비들을 하나의 밀폐된 용기(격납 용기)에 넣어 규모를 줄이고 공장에서 모듈 형태로 만든 것이다. SMR 구성에서 대형 원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냉각 시스템이다.
대형 원전은 뜨거워진 원자로를 식히기 위해 냉각수를 사용하는데 재난재해로 냉각계통에 문제가 발생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2011년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경우에도 원자로가 침수되면서 정전이 발생했고 냉각 펌프가 작동하지 않게 되자 노심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이에 비해 가압경수로형 SMR은 자연 대류 현상을 이용해 원자로를 식힐 수 있는 피동안전계통(Passive safety system)을 적용해 안정성을 높였다. 냉각 시스템을 위한 부품과 장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크기를 줄이는데도 용이하다. 현재 가장 상용화에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미국 뉴스케일파워의 77MW급 SMR은 높이가 23m, 직경 4.6m. 무게 700t으로 설계됐다.
SMR은 기존 대형원전에 비해 작고 안전하기 때문에 수요지 근처에 건립할 수 있다. 이때 핵분열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열에너지를 활용해 지역난방과 산업공정, 해수의 담수화에 이용할 수 있다. 또 SMR의 전기에너지를 이용해 수소를 생산한다면 수소 가격을 크게 낮춰 수소 사회로의 전환을 앞당길 수도 있다.
4세대 SMR에 앞다퉈 투자하는 빅테크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80여종의 SMR이 개발 중에 있다. 뉴스케일은 기존 3세대 가압경수로형 원전을 기반으로 SMR을 설계해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가압경수로형은 현재 전 세계 원자로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기술이 성숙해 있다. 뉴스케일의 SMR은 2020년 미국에서 처음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설계인증 심사를 완료했다. 우리나라가 국책과제로 개발 중인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 역시 가압경수로형으로 개발되고 있다.
최근에는 4세대 원전을 기반으로 한 SMR이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 14개국 원전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4세대 원자력 시스템 국제 포럼(GIF·the Generation Ⅳ International Forum)은 기존 원자력보다 안정성과 경제성을 높인 미래형 원자로를 선정했다.
가스냉각고속로(GFR·Gas-Cooled Fast Reactor), 초고온가스로(VHTR·Very High Temperature Reactor), 용융염 원자로(MSR·Molten Salt Reactor), 납냉각고속로( LFR·Lead-Cooled Fast Reactor), 소듐냉각고속로(SFR·Sodium-Cooled Fast Reactor), 초임계압경수로(SCWR·Super Critical Water Cooled Reactor) 등이다. 이러한 원전들은 그동안 원전 확대의 걸림돌로 여겨지던 안전성과 핵폐기물 처리 문제를 해소해 대중 수용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최근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투자하거나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 공급계약을 맺고 있는 것들은 주로 4세대 원자로를 기반으로 한 SMR이다. 4세대 SMR은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2030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상용화될 예정이다.
빌 게이츠가 투자한 기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테라파워는 소듐냉각고속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SK와 HD현대가 테라파워에 투자했다. 테라파워는 지난해 6월 와이오밍주에서 소듐냉각고속로를 활용한 345㎿ 용량의 '나트륨(Natrium)' 원자로를 착공했다. 테라파워의 투자사이기도 한 HD현대가 이 프로젝트의 원통형 원자로 용기의 제작을 맡는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주기기 공급사로 참여한다. 인공지능(AI) 기업 오픈AI의 창업자 샘 올트먼이 투자한 오클로(Oklo) 역시 소듐냉각고속로 기반의 SMR인 '오로라(Aurora)'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소듐냉각고속로는 액체 나트륨을 원자로 냉각재로 사용하는 고속중성자로(고속로)를 말한다. 나트륨은 끓는 점이 883℃로 높기 때문에 가압경수로처럼 끓는 점을 인위적으로 높이기 위해 높은 압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고속로란 고속 중성자를 핵분열 반응에 이용하는 원자로를 말한다.
가압경수로에서는 물을 감속재(원자로의 핵분열반응 과정에서 생성되는 고속중성자를 열중성자로 감속시켜 핵분열이 더 잘 일어나도록 하는 물질)로 사용해 핵분열 반응의 확률을 높인다. 반면 고속로에서는 빠른 중성자를 그대로 활용해 핵분열일 잘 일어나는 플로토늄239를 생성한다. 고속로에서는 자연 상태에서 99%를 차지하는 천연 우라늄238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구글이 지난해 10월 전력 구매 계약을 맺은 미국 원전 스타트업 카이로스파워(Kairos Power)는 용융염 방식의 원자로를 개발하는 곳이다. 카이로스파워는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1억달러를 투자해 2027년 가동을 목표로 시범 원자로 '헤르메스(Hermes)2'를 건설하고 있다. 카이로스파워가 구글에 공급하는 전력을 생산하는 원자로는 2030~2035년경 가동할 예정이다.
용융염 원자로는 불소 혹은 염소 화합물의 용융염(molten salt·고체인 염을 가열해 용해한 것)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원자로다. 핵연료를 용융염에 함께 녹여 원자로의 연료 및 냉각재로 활용한다. 연료와 혼합된 용융염은 대기업에서 400~500℃의 녹는점과 1400℃의 끓는 점을 가지며 외부에 유출될 경우 바로 고체로 변하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의 누출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다. 핵연료와 냉각재를 일체화해 격납 용기의 크기를 소형화할 수 있다.
아마존이 지난 10월 투자를 발표한 엑스(X)에너지는 고온가스냉각로(HTGR·High Temperature Gas-Cooled Reactor) 방식의 SMR을 개발하고 있다. X에너지는 총 발전용량 320㎿ 규모로 80㎿원자로 4기로 구성된다. 아마존은 2039년까지 X에너지의 SMR 5GW 이상을 구매할 계획이다. X에너지의 SMR 프로젝트에는 우리나라에서 두산에너빌리티, DL이앤씨, 한전 KPS가 참여한다.
냉각재로 헬륨가스,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는 원자로를 고온가스로라고 통칭한다. 여기에 원자로의 온도에 따라 초고온가스로(VHTR·Very High Temperature Reactor) 혹은 HTGR로 구분하며 기본 원리는 동일하다. 헬륨은 불활성 기체로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적이어서 원자로의 부식 우려가 없으며 방사성 물질 외부 누출에 대한 위험이 적다.
고온가스냉각로에 사용하는 핵연료는 트리소(TRISO·Tri-Structural ISOtropic coated fuel)라는 물질이다. 트리소는 지름 0.5㎜ 의 둥근 핵연료에 열분해탄소, 탄화규소와 같은 세라믹을 코팅해 직경 1㎜의 구형 입자로 만든 것이다. 트리소에 흑연 블록에 넣어 분필 모양으로 만들거나 조약돌(페블·Pebble) 형태로 성형해 원자로에 장전한다. 트리소 기반의 핵연료는 구조상 핵분열 생성물의 외부 누출 가능성이 매우 낮아 안정성이 뛰어나다. 고온가스로는 950℃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이 열을 다양한 산업 공정에도 활용할 수 있다.
美는 4세대 원전 속도내는데 …예산 삭감한 韓 국회
SMR이 향후 원전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으로 예상함에 따라 각국 정부는 차세대 SMR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 프랑스, 영국, 캐나다, 일본, 러시아, 중국, 아르헨티나 등 원자력 강국들은 SMR 개발 및 사업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특히 미국 에너지부는 차세대원자로실증프로그램(ARDP)을 통해 SMR 기업들이 제안한 설계 개념들을 2030년 이내에 실증할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설계 및 운영상 예상되는 어려움을 미리 해소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미 에너지부는 2020년 ARDP 초기 지원 대상으로 테라파워와 X에너지를 선정해 각각 8000만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카이로스파워도 ARDP에 선정돼 7년간 3억300만달러를 지원받고 있다.
중국 칭화대는 10㎿급 페블형 고온가스시험로를 2000년 완공해 실증시험을 수행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2021년 웨이하이시에 고온가스로형 실증로 HTR-PM을 건설했다. 일본원자력연구원(JAEA)은 고온가스로형 시험로 HTTR을 활용한 수소 생산 실증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소듐냉각고속로와 고온가스로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소듐냉각고속로는 사용후 핵연료 처리 기술의 일환으로 연구되고 있다. 소듐냉각고속로는 사용후 핵연료에 포함된 고독성 장수명 핵종인 플루토늄239를 핵연료로 활용해 단수명의 안정된 핵종으로 변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또한 수소경제 시대를 대비해 고온가스로를 이용한 원자력수소 생산 기술 개발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실증을 넘어 상용 원자로를 건설하고 있는 해외에 비해 국내 개발은 상당히 더딘 수준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6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차세대 원자력 확보를 위한 기술개발 및 실증 추진방안'을 의결했다. 정부 로드맵에 따르면 소듐냉각고속로는 2025년부터 설계와 부지조사, 고온가스로의 경우 2024년부터 설계와 부지조사를 거쳐 2036년에 시운전을 개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미국의 ARDP를 모방한 한국형 차세대 원자로 기술 개발 및 실증프로그램(K-ARDP)도 도입하기로 했다.
과기부는 지난해 7월에는 민관이 함께 4년간 455억원을 투입해 민관합작 차세대 원자로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이 사업은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포스코이앤씨, 대우건설, 스마트파워, SK에코플랜트, 롯데케미칼 등 기업이 함께 2027년까지 국내 독자 고온가스로 기본설계 및 종합 플랜트 설계를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과기부는 올해 '민관 합작 선진 원자로 수출 기반 구축 사업'을 통해 소듐냉각원자로 실증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국회가 지난해 12월 정부 예산을 심의하면서 관련 예산 70억원을 7억원으로 삭감했기 때문이다.
강희종 기자 mindl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