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회사로 택배가 도착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취재 갔다 무심코 후원을 결정한 국제어린이양육기구로부터 온 뜻밖의 곰 인형 선물이었다. "후원자님의 15년간 한결같은 사랑을 통해 어린이들은 가난을 넘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는 거창한 글귀를 새긴 감사패도 동봉됐다. 사실 그동안 후원금만 보냈을 뿐 바쁘다는 핑계로 후원하는 어린이와 깊은 연대를 쌓지 않았다. 어린이가 성인이 되면 새로운 아이에게 후원금이 전달된다는 소식만 가끔 접했을 뿐이다. 지금 후원하는 어린이는 필리핀에 사는 제제다. 집에 있는 아들과 동갑내기다. 아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면서 먼 곳에 있는 또 한 명의 아들에게도 선물을 보냈다.
![[초동시각]생색이라도 좋다](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4112715210127083_1732688461.jpg)
매년 12월20일은 '세계 인류 연대의 날'이다. 유엔(UN)은 2000년 열린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자유, 정의, 관용, 자연에 대한 존중, 책임의 공유와 더불어 연대를 국제관계의 근본 원칙으로 꼽았다. 밀레니엄 선언에서는 연대의 원칙에 대해 "우리 지구가 직면한 도전은 형평성과 사회 정의의 기본 원리에 따라 비용과 부담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관리돼야 한다"면서 "가장 적은 혜택을 받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은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는 사람으로부터 도움받을 자격이 있다"고 서술했다. 세계 인류 연대의 날은 국내외에서 고통과 슬픔 속에 있는 이들에게 세계인들이 하루만이라도 따뜻한 관심과 손길을 내미는 실천의 경험을 갖고자 만든 날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세계 곳곳에는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이 많다. 매년 겨울이 찾아오면 거리 곳곳에서 구세군 자선냄비를 찾아볼 수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온도탑을 보면서 주변을 돌아보며 쌈짓돈을 기부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올해는 기부와 후원이 예년보다 많이 줄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비상계엄의 늪'에 빠져 이웃을 돌아볼 여유를 빼앗겼다. 계엄 해제를 빠르게 의결하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던 국회의원들은 어느덧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민생 안전은 뒷전에 두고 제 밥그릇만 탐하고 있다. 각종 연말 모임과 행사는 취소됐고 자영업자들은 신음하고 있다. 연말 기부를 독려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희망 종소리마저 구슬프게 들린다.
소외된 이웃을 챙겨온 '사랑의 열매' 기부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52억원 줄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사랑의 온도탑도 예년보다 낮다. 지난해는 모금 목표액을 초과 달성해 111.2도를 기록했는데, 올해는 목표액 달성도 어려운 상황이다. 올해 사랑의 열매 배지를 단 정치인, 공무원을 찾아보기 힘들다. 올해 사랑의 열매 나눔 리더에 선정된 정치인 수는 지난해(67명)보다 30명 적다. 나눔 리더는 1년 내 100만원 이상을 기부한 개인들에게 붙여진 칭호다. 12월만 놓고 보면 정치인 가운데 오세훈 서울시장만 기부자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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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생색이라도 좋다. 한겨울 차갑게 움츠러드는 세상에 마음이 다사해질 수 있는 목소리라도 동참해주길 바란다. "다 좋다. 다 좋은 데 지금 당장 배고픈 사람들은 어떻게 할 텐가."
임혜선 기자 lhs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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