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하원, 바르니에 정부 불신임안 가결
바르니에 총리, 정부 사퇴서 제출해야
내년도 긴축 예산안 처리 가능성 멀어져
마크롱 대통령 리더십 시험대
프랑스 정국 격랑에 휩싸일 듯
프랑스 하원이 4일(현지시간) 미셸 바르니에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정부가 내년도 긴축 예산안을 처리하기 위해 '의회 패싱'이라는 카드를 선택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9월 출범한 바르니에 정부는 약 2개월 반 만에 해산될 처지에 놓였다.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최단기간 집권한 정부로 남게 되는 동시에 1962년 조르주 퐁피두 정부 이후 프랑스 정부가 하원의 불신임안 가결로 붕괴한 첫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 하원은 좌파 연합이 발의한 바르니에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이날 저녁 표결에 부쳐 찬성 331표 대 반대 243표로 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하원 재적 의원은 총 574명(3명 공석)으로 불신임안 가결 정족수는 288석이었다. 불신임안을 발의한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과 역시 자체 불신임안을 발의한 극우 국민연합(RN)과 그 동조 세력이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바르니에 총리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정부의 사퇴서를 제출해야 한다. 바르니에 총리는 취임 90일 만에 하원의 불신임을 받으면서 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바르니에 정부의 붕괴를 이끈 극좌 정당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마틸드 파노 원내대표는 "마침내 바르니에 정부가 폭력적인 예산과 함께 몰락했다"며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강조했다.
바르니에 정부와 야당은 2025년 예산안을 두고 갈등을 빚어왔다. 바르니에 정부는 국가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 지출 감축, 세금 인상을 골자로 한 내년도 긴축 예산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야당은 사회 복지 축소, 소비 심리 약화, 기업 부담 등을 이유로 정부 예산안을 반대해 왔다.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바르니에 총리는 지난 2일 정부의 책임하에 하원 표결 없이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헌법 제49조3항을 발동해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불신임안이 발의돼 이날 표결에 부쳐진 직접적인 원인이다.
바르니에 정부가 붕괴하면서 내년도 예산안 처리는 불투명해졌다. 연말까지 내년도 예산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공 행정이 마비되는 '셧다운'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현재로선 올해 예산을 내년까지 연장하는 방안이 유력해 보이나 이 경우 재정 감축 조치를 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올해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6.1%일 것으로 관측되는 프랑스는 유럽연합(EU)으로부터 재정지출을 줄이라는 압박을 받는 상황이다.
역사적인 정부 붕괴로 마크롱 대통령은 또 한 번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됐다. 극좌 정당은 바르니에 정부에 이어 마크롱 대통령의 사임까지 요구하고 있다. 다만 마크롱 대통령은 전날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중 관련 언론 질의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이라며 사임 가능성을 차단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신속히 새 후임 총리를 임명할 것으로 보인다. 마크롱 대통령은 오는 7일로 예정된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 기념식에 앞서 새 총리를 임명하길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프랑스 현지 매체는 마크롱 대통령이 중도 연합에서 총리를 선출할 것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총리 임명을 두고 정당 간 견제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돼 프랑스 정국은 격랑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것으로 관측된다. 프랑스 매체 르 몽드는 "의회 기능 마비 속에서 새 정부를 수립해야 하는 마크롱 대통령의 임무는 '다섯 발 달린 양을 찾는 행위'와 같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또 어렵사리 새 내각이 들어서더라도 대대적인 개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기 총선 이후 어떤 정당도 의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다. 이에 따라 의회 해산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6월 의회를 해산한 만큼 1년에 한 차례만 해산할 수 있다는 헌법 규정에 따라 2025년 6월 이후에야 의회를 해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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