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사태 장기화에 유휴선박 부족
항로 우회에 싱가포르·말레이에 쏠려 정체↑
선박 추가 투입 한계…전략적 관리 필요
‘빈 배’가 부족한 건 물동량이 특정 지역에 쏠리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해상운임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서 선박을 묶어두는 일이 발생하자 다시 운임을 자극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홍해 사태의 나비효과
예멘 반군의 무차별 공격 선언이 촉발한 홍해발 해상운임 폭등은 나비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1회 운항당 걸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줄줄이 일정이 순연됐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여유분을 모두 투입하면서 빈 배가 없는 상황이 됐다. 선박 발주와 도입은 단기간에 이뤄지기 힘들기 때문에 새 선박을 신속히 공급하기도 어렵다.
지역 편중 현상도 심해졌다. 홍해 사태의 안전한 우회로로 싱가포르항과 말레이시아 포트클랑항을 손꼽으면서 배와 컨테이너가 쏠렸다. 수출입 물류플랫폼 ‘트레드링스’에 따르면 두 항구의 평균 체류시간은 항로 우회 전 각각 1일, 1.5일이었지만 홍해 우회가 시작되면서 각각 2일과 3일로 두배 늘었다. 같은 기간 부산항의 체류시간 증가폭이 10%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이들 항구 정박기간은 많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두 항구 주변에 수십척의 배가 입항을 기다리면서 적체가 시작됐고 국제적으로 운항시간이 길어지고 유휴 선박이 줄어드는 상황이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수출물량도 확대됐다. 미국의 대(對)중국 관세 인상을 앞두고 중국이 수출물량 밀어내기에 나서면서 아시아에서 출발하는 선박을 죄다 쓸어갔다. 유럽과 미국의 수입업체들이 알리와 테무 등 중국 이커머스사의 저가 상품을 미리 확보해두려는 경쟁도 일어났다. 아시아에서 출발해 미국과 유럽 지역으로 이동한 컨테이너와 선박이 적체되면서 제때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다리는 선박이 늘면서 긴급 투입용 선박도 동나고 있다"라며 "중국에서 밀어내는 물량까지 더해져 뱃길이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고 설명했다.
이는 국내 선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북미향 해운은 중국에서 부산을 거쳤는데, 선박 적재 공간이 부족하자 국내 입항을 건너뛰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부산항만공사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부산항에 입출항한 선박 수는 7045척으로 전년 동월 대비 13% 줄었다.
정부 나섰지만 물리적 한계
국제 해상운송 항로의 운임 수준을 나타내는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 5일 기준 3733.8을 기록했다. 2022년 8월 이후 최고치다. 13주 연속 상승하면서 연초 대비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운임 상승세에 정부도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연초부터 단계별 대응 조치를 시행 중이다. SCFI 역대 최고치(5109.60)를 기준으로 절반 수준인 2700(2단계), 75% 수준인 3900(3단계)에 도달할 때마다 대응 수위를 높인다. 지난달 이미 국적선사 HMM을 통해 수요가 많은 미국 서안과 동안, 중동 지역 등에 선복량 9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 규모 임시선박 3척을 긴급 투입하기로 했다. 하반기에는 대형 신조 컨테이너선 7척(총 7만TEU 규모)을 주요 노선에 투입하고 항차(선박이 정해진 항로를 한 바퀴 도는 것)당 1685TEU 규모의 중소·중견기업 전용 선복 공급을 추진하기로 했다. 현재는 3단계 조치 기준을 돌파할지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공급 위주 정책은 물리적인 선복량 한계 때문에 무한정 펼칠 수 없다. 그렇다고 수출기업에 수요를 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앞서 공정거래위원회는 23개 국내·외 선사가 한국과 동남아시아 지역 항로 운임을 15년간 담합했다며 총 과징금 900억원을 부과했다. 하지만 선사들이 이에 불복해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연초부터 취소판결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헌구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교수는 "완전히 시장 논리로 가격이 형성되는데, 그 와중에 또 시장의 힘이 강해졌다 보니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줄었다"고 설명했다.
수출기업 물류비 보조 필요
결국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수출기업의 물류비를 보조해주는 방안이다. 정부는 최근 하반기에 지원할 수출 바우처 202억원을 조기에 집행하고 향후 운임 상승 추이를 고려해 추가 운임 지원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현재 정부는 수출 유망기업을 선정해 기업 규모별로 3단계로 나눠 쿠폰 형태의 수출바우처를 제공하고 있다. 바우처는 최대 1억원까지 지급되며, 이중 물류비로 최대 3000만원까지 쓸 수 있다. 이 물류비 한도를 1000만원 이상 늘리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하 교수는 "규모가 작은 수출기업들은 운임 상승을 상품가격에 전가할 수 있는 경쟁력도 협상력도 없다"며 "원·달러 환율이 높은 상황이 그나마 해상운임 상승의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에 수출 바우처 등의 지원을 보다 정교하게 펼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민우 기자 letzw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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