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에도 감각 잃지 않으려
막달까지 꾸준히 발레단 출석
출산 5개월 만에 복귀작 '미리내길'
나이·신체 악조건 딛고 혼신의 무대
무용계 아카데미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 수상 영예
발레를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큰 시련이 있다. 발레리나에게는 출산, 발레리노는 군대다. 이를 기점으로 많은 사람이 은퇴를 결정하고, 복귀하더라도 떨어지는 기량에 곧 한계를 마주한다.
이런 까닭에 올해 발레계는 강미선 유니버설 발레단 수석무용수에 주목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 '워킹맘' '출산 후 복귀' 등 이른바 한계로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뛰어넘어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확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할 당시 그는 발레 '돈키호테'를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6월에 브누아 드 라 당스 시상식이 있었지만, 9월 호두까기 인형 갈라 공연과 10월 돈키호테 공연을 위해 기쁨을 즐길 틈도 없는 시기를 보냈다고 했다. 그는 "매일 오전 10시에 나와서 몸을 푸는,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며 "공연이 임박하면 주말도 반납하고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임신 중에도 빠른 복귀를 위해 발레를 놓지 않았다. 수상의 영광을 안긴 발레 ‘미리내길’은 출산 후 5개월 만에 복귀한 후 선보인 무대다. 그는 “임신 중에도 꾸준히 발레단에 나와 스트레칭하고, 클래스에 참여했는데 (출산) 막달 전까지 계속 나와 꾸준히 몸을 움직였다”며 “토슈즈도 오래 안 신으면 발목 등이 아픈데, 임신 중에도 토슈즈를 계속 신고 발레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발레 돈키호테에서 그가 맡은 역은 여관 주인의 딸 키트리. 돈키호테의 주인공은 돈키호테도, 산초도 아닌 이발사 바질과 키트리다. 소설 속의 조연들이 발레 무대의 주연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강미선은 "등장부터 뛰어서 무대에 나와야 하고, 큰 점프도 많고, 파트너가 들어 올리는 동작도 많아 클래식 작품 중에서는 굉장히 힘든 역할"이라며 "체력적으로 힘이 가장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키트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커리어에 대해 고민할 시기, 키트리는 그에게 발레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됐다.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받기까지 발레리나로서의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선화예중, 선화예고를 거쳐 유학을 다녀온 후 2002년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했다. 코스를 밟았으니 앞날은 탄탄대로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발레에서는 무용수의 체형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키가 작고 튼튼한 체형이라 백조의 호수 요정 등의 배역을 맡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캐스팅도 빨리 되고, 주인공 역할도 금방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말했다. "20대 후반은 정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먼저 주연 캐스팅을 받고, 나는 뒤에서 계속 군무를 하고 있으니 속이 상하더라"며 "그때 무엇이 문제라는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한 상태로 방황했다"고 덧붙였다.
결국 돌파구는 연습밖에 없었다. 그는 "주인공보다 더 기억에 남는 조연이 돼야겠다고 생각해서 무대에 올리기 전 스튜디오에서 동작을 할 때 모든 사람이 '와'하는 감탄사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했다"며 "조연인데도 관객들이 강미선씨의 역할이 눈에 띈다, 잘하더라 하는 후기를 남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돈키호테 주연인 키트리를 맡게 됐다. 강미선은 "체형이 단점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극복하는지 알고 있어 감정 표현이나 상체 움직임 등에 신경을 써서 최대한 시선을 끌어올렸다"며 "무엇보다 키트리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 역할이라 내 본래 성격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당시엔 연기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어느덧 그의 대표작 목록에는 '돈키호테 키트리'가 같이 오르게 됐다. 어떤 주연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체험에서 나온 조언이다.
덕분에 발레리나에게는 어려운 작품으로 꼽히는 돈키호테를 마흔의 나이에 또다시 선보일 수 있게 됐다. 불혹의 나이에 시종일관 무대를 뛰어다니는 키트리를 연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내가 마흔이라는 나이에도 춤을 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며 "오래 계셨던 선배들도 서른 중후반에는 은퇴했기 때문에 마흔이 넘는 나이까지 발레를 하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가 그 나이"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아직 몸이 버텨주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며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가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오히려 연륜이라는 걸 체감하고 있다. 그는 “20대 때는 잘할 수 있을지 긴장하고 조마조마했다면, 지금은 어느 부분에서 어떤 표현을 해야 할지 계산이 바로 돼서 작품을 대하는 게 편하다"며 "노하우와 여유가 많이 생겼다”고 말했다.
마흔 살 이후의 계획은 없다. 올해 작품에 모두 쏟을 예정이다. 무대에서 뛰게 하는 첫 번째 동력은 관객에게 있지만, 이제는 춤을 출 수 있게 아이를 봐주시는 부모님, 기회를 주는 사람들, 아이라는 다른 동력과 책임이 있다.
그는 “원래 이런 질문에는 항상 앞으로 1~2년 정도 더 발레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대답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해야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쓸 수 있다”며 “이번에도 딱 올해 1년, 무리 없이 큰 공연을 올릴 때까지 무대에 있는 게 계획으로 진로는 이후에 생각할 것 같다”고 답했다.
강미선은 “결국 최고가 되는 길은 자신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다”며 “브누아 드 라 당스는 20년 한 우물을 파서 받은 인정이라고 생각한다"며 "최고에 도전한다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자신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언젠가 모두에게 인정받는 순간이 온다고 믿는다.
▶강미선 유니버설 발레단 수석무용수는
1983년생으로 선화예중·고를 거쳐 미국 Kirov Academy of Ballet를 졸업했다. 이후 2002년부터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해 활동 중이다. 2005년 드미 솔리스트, 2006년 솔리스트, 2010년 시니어 솔리스트를 거쳐 2012년부터 수석무용수를 맡고 있다. 2009년 한국발레협회 프리마발레리나상, 2016년 서울무용제 연기상, 2018년 한국무용협회 김백봉상 등의 수상을 거쳐 2023년 우리나라의 정서를 녹여낸 창작 발레 '미리내길'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을 받았다. 대표작품으로는 '돈키호테'의 키트리, '오네긴'의 타티아나, '호두까기 인형'의 클라라 등이 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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