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1세대 주자에서 ‘행복경영’ 지향 CEO로
식품전문 MD, 꽃집 사장 등 다양한 사회 경험
자유롭게 시간 활용하며 일할 수 있는 창업 선택
장래 희망란에 'CEO'를 써낸 여고생은 홈쇼핑 1세대로 산업을 이끌어오다가 상품 기획·유통 전문회사를 차렸다. 한국여성벤처협회 부회장인 김정희 유웰데코 대표의 이야기다. 1970년생인 김 대표는 어릴 적부터 위인전 읽기를 좋아했다. "한 인물의 일대기를 보면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배운 것 같다"고 했다. 산업혁명 시대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자연스레 CEO를 꿈꾸게 됐다.
일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 '정직·근면·성실'이라는 원칙을 지켰다. 고향이 이북인 아버지가 정한 가훈이다. 남에게 빚지고 살아선 안 된다며 신용카드도 만들지 않았던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깐깐한 사업가의 기질을 갖게 됐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터라 김 대표의 어머니도 사회생활을 오래 했다. 그는 음식을 직접 배워 식당을 운영했다. 김 대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여성이 사회생활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고 말했다.
홈쇼핑 1세대…출산 후 꽃가게 창업, 식품 전문 MD로
김 대표는 1997년 39쇼핑에 입사하면서 홈쇼핑 업계에 발을 디뎠다. 당시 홈쇼핑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미국의 홈쇼핑 산업을 한국 시장에 맞게 만들어 나가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직장생활에서 남자가 주도하고 여자는 보조 역할을 했는데, 홈쇼핑 산업은 달랐다. 지금의 스타트업처럼 남녀가 평등한 분위기 속에서 젊고 능력 있는 직원들이 열정적으로 일했다. MD로 경험을 쌓다가 출산을 위해 퇴사한 후 경력직으로 NS홈쇼핑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식품 전문 MD로 5년 동안 일했다.
첫 직장을 관두고 육아를 하면서 꽃집을 운영한 경험도 있다. 김 대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정서적으로 만족감이 컸지만 돈이 되진 않더라고요. 상품 기획만 해봤지 실제로 사업을 운영하는 게 쉽진 않았어요. 다만 자영업을 해보니 홈쇼핑 시장에 들어오는 중소기업 대표님들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됐어요." 여성의 사회활동이 흔하지 않던 시절, 한 백화점 바이어와 만난 자리에선 "식품 MD가 여자인가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당시 백화점의 식품 바이어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산지 제품을 발굴하기 위해 발로 뛰는 험난한 지방 출장이 많은 탓에 주로 남자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식품 MD는 가정주부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여성에게 유리했다. 해당 기업이 홈쇼핑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됐는지 따져보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홈쇼핑에서 팔 수량을 확보할 여력이 되는지, 전국 각지에 택배 배송이 가능한지 꼼꼼히 알아봤다. 구매 포인트를 잡고 적절한 구성과 가격을 책정한 후 포장은 어떻게 할지, 재고를 어떻게 정리할지 모두 MD가 담당해야 하는 업무였다. 소비자의 욕구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해야 했다. "다이어트 열풍이 불면서 '귀리'가 뜨기 시작했어요. 시장에 흔하지 않은 희소성 있는 제품을 소개하고 소비자에게 인지시키는 일이 중요했죠." 그는 "반품·취소를 줄이기 위해 제품 손질 방법, 조리법까지 적어줘야 할 정도로 세밀함이 필요했다"며 "이러한 노하우는 추후에 동남아시아 홈쇼핑 채널이 벤치마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7년 창업, 매출 200억…"끊임없이 공부해야"
MD라는 직종은 선후배 사이에도 경쟁이 치열했다. 목표 실적을 달성했는지 여부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고 승진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우수한 제품을 누구보다 발 빠르게 발굴해서 성공적으로 매출까지 내야 하는 일이다. 그는 "목표액을 못 채우면 회사에서 버티기 힘들어진다"며 "끊임없이 트렌드를 공부하고 주도적으로 업무에 임해야 하는 직종"이라고 설명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MD로 계속 살아갈지, 창업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주말을 할애해서 일해도 시간이 없더라고요. 요새 학교폭력 같은 이슈가 많이 나오는데, 부모가 학교 교육에 신경 쓰지 못하면 아이가 뒤처지거나 소외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일할 수 있는 창업을 택했어요." 2007년 김 대표는 그동안의 노하우와 경험을 활용해 유웰데코를 세웠다. 유웰데코는 '유비쿼터스+웰빙+데코'를 합친 말이다. 주변인들에게 권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제품을 소개하는 기획 전문 업체를 지향한다.
"기획 업무는 단순 유통과 달라요. 항상 소비자 입장에서 젊은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일례로 과일을 납품할 때 백화점과 대형마트는 성격이 다르죠. 백화점은 값이 비싸더라도 크고 당도가 높은 상품이, 대형마트는 합리적인 가격에 대량으로 팔릴 만한 상품이 적합합니다." 유웰데코는 곰탕·불고기·도가니탕 등 한식을 전문으로 하는 '노포 브랜드'들을 성공적으로 알려 업계에서 이름을 날렸다. 때마침 코로나19로 오프라인 매장 영업이 직격탄을 맞자 홈쇼핑 제품들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우리 상품을 홈쇼핑에서 팔아야 하나"라고 의문을 갖던 노포 사장님들도 차차 설득되기 시작했다. 소고기 장조림을 상온 제품으로 제작해 홈쇼핑에 팔아서 5년 넘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중소기업의 다양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홈쇼핑뿐만 아니라 각종 배달 애플리케이션, 온라인 쇼핑 사이트, 식품 전문 플랫폼 등 수요처에 맞는 상품 기획 업무를 전담한다. 이제는 연매출 200억원을 찍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경력단절 되면 더 힘들어져…직장 쉽게 관두지 말라
창업을 꿈꾸는 사회 초년생에게는 자신의 분야에 경험을 충분히 쌓으라고 조언한다. 그는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관문이 있지만 몇 년만 버티면 지나간다"며 "경력단절이 일어나면 나중에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직장을 쉽게 관두지 말라"고 했다. 김 대표는 사내벤처 형식으로 후배 인재를 육성하고, 사업적으로 협력할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또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스타트업 CEO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네트워크를 쌓고 있다.
그는 초보 여성 창업가를 만나면 '가족과 기업의 일대기'를 써보라고 권한다. "회사가 5년 차일 때 나를 포함해 가족 구성원의 나이는 얼마가 되는지,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해가 되면 사업적인 면에서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 대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행복하게 만드는 경영을 추구한다. 그는 "내 가족과 친구, 이웃이 행복해지면 사회와 국가도 행복해진다"며 "내 가정이 바로 서야 사업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희 대표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정희 대표는 39쇼핑과 NS홈쇼핑에서 10여년간 홈쇼핑 1세대 MD로 경력을 쌓았다. 식품 전문 MD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2007년 유웰데코를 창업했다. 유웰데코는 중소기업 판로 개척을 위해 홈쇼핑 채널, 온라인 플랫폼 등과 연결하는 상품 기획 업무를 전담한다. 노포 브랜드 메뉴를 홈쇼핑을 통해 알리며 코로나19 위기를 함께 극복했다. 2017년부터 한국여성벤처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후배 여성 창업가들에게 든든한 멘토가 돼주고 있다.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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