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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0과 1 사의의 무한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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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로 만든 디지털 세계
아무리 편해도 사람의 기억이 최고 저장장치

[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0과 1 사의의 무한을 기억하다 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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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펜싱선수와 기자의 청춘 사랑을 다룬 드라마가 인기였습니다. 저도 주말을 기다릴 정도였죠. 그런데 연출이 섬세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또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드라마는 마치 예전의 필름 사진처럼 영상을 처리했더군요. 그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추억과 감정마저 박제한 색감과 영상에 몰입됐습니다. 물론 시간의 되새김질인 모든 추억은 그 자체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필름처럼 아날로그 매체가 주는 감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실 디지털 세계를 파고 들어가 보면 0과 1로 조합된 세상입니다. 그 세계에는 두 숫자 사이에 어떤 중간값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령 0.1이나 0.5 같은 건 존재하지 않죠. 흑백 논리나 참과 거짓처럼 불연속적이고 정해진 값이 세상을 설명하고 표현하는데 유리한 건 맞습니다. 마치 수학처럼 답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과 거짓이 섞여 있고 흑백이 아닌 회색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명확한 답의 알갱이로 채워진 것도 아니고 연속적이며 그 사이를 파고들수록 닿을 수 없는 ‘무한’이 존재하는 세계에 사는 것이죠. 그래서 늘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가 이어집니다.

[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0과 1 사의의 무한을 기억하다

숫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중간의 무한한 세상 존재

드라마는 딸이 엄마의 일기장을 보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문득 제 아버지가 쓰셨던 SLR(Single Lens Reflex) 카메라에 얽힌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기자로 재직할 때부터 쓰셨던 오래된 필름 카메라였죠. 아버지가 작고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찾은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인지 흔했던 사진관도 찾기 어렵더군요. 간신히 찾은 곳에서 현상한 필름에 별다른 것이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니 무언가 담겨있긴 했습니다. 이미 한 줄기 빛을 온몸으로 받은 필름은 한 번도 세상을 만나지 않은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죠. 사진관 주인은 말렸지만, 인화를 부탁했습니다. 며칠 후 사진관 주인은 열 장 남짓한 사진을 건네며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의미 없는 인화를 하느냐’고 덧붙이더군요. 무안함보다 화가 치밀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이런 물건을 여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냐는 의아한 표정과 귀찮다는 듯한 퉁명스러운 태도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사연이란 것이 있다는 짐작조차 하지 않는 건조함에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넌지시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시간이 기록돼 있잖아요. 한 귀퉁이에…’


기억이 냄새와 함께 뇌에 저장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장면을 떠올리면 향기가 나기도 하고 그 반대일 경우가 있죠. 제 경우는 필름에서만 맡을 수 있는 시큼한 식초 향이 섞인 화학물질 냄새와 현상과 인화를 하던 아버지 모습을 함께 새긴 모양입니다. 식초 향은 아세트산 때문입니다. 지금의 필름은 폴리에스터(polyester)라는 고분자 물질로 만들지만, 과거에는 초산염 필름 혹은 아세테이트 필름을 사용했습니다. 초산염 필름은 1909년부터 ‘이초산나트륨’으로 제작되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트리아세틸셀룰로스’로 제작됐습니다. 이전에는 질산염 필름도 같이 사용됐죠. 질산염 필름의 주성분은 폭약인 나이트로셀룰로스(nitrocellulose)입니다. 면화약이라고도 불렀죠. 실제로 대형 영화사 필름 창고가 전소된 사건도 여러 번 있었고 미국의 1950년대 이전 영화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주인공인 알프레도가 실명하게 된 계기도 영사기 과열로 인한 필름 폭발과 화재였습니다. 개선된 초산염 필름은 상대적으로 가연성이 적어 안전한 필름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필름 가장자리에 ‘SAFETY FILM’이라고 표기하기도 했죠. 하지만 초산염 필름도 약점이 있습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필름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죠. 필름의 성분인 아세테이트가 공기 중 수분과 반응해 아세트산, 즉 초산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식초의 향은 이 화학반응 때문이었습니다. 초산이 발생하면 촉매로 작용해 화학반응을 가속하고 빠르게 필름을 훼손합니다. 과거 영화나 기록물들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인 것도 이런 화학적 열화 반응으로 인한 훼손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디지털 문명이 인류의 문명과 함께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0과 1 사의의 무한을 기억하다

아버지가 남긴 카메라·필름, 아세트산의 시큼한 추억

우리는 영상을 디지털 화면으로 봅니다. 지금 8K 디스플레이까지 등장했죠. 8K TV는 가로에 약 8,000픽셀을 갖춘 TV라는 겁니다. 8K의 3,300만여 개의 픽셀은 그만큼 이미지가 선명하고 표현이 세밀하게 영상을 구현해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깊이감과 현장감을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해상도에 맞는 DSLR 같은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야 합니다.


필름은 표면 위에 은(silver) 입자 하나하나가 불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빛에 반응하는 특성 역시 동일하지 않아 명암 및 색조의 변화가 유기적으로 표현됩니다. 반면 디지털카메라는 센서의 화소가 규칙적이고 픽셀 하나에 빨강, 초록, 파랑색만 기록이 가능하고 나머지 색은 보간을 통해서 얻은 베이어 필터 Bayer filter라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색과 경계의 변화가 계단처럼 급격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반도체라는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기존의 필름이라는 매체의 소멸을 예상했지만, 필름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색과 질감의 감성은 물론 이미지 농도조차 아직은 따라잡을 수 없어 최근 다시 부활하는 추세죠. 서구의 몇몇 유명한 영화감독들은 여전히 필름 촬영을 고집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 최근에 유행했던 한국 드라마는 디지털카메라로 촬영 후 인공지능 필터로 예전 감성을 비슷하게 부활한 것 같습니다.


사실 폴리에스터로 만들어진 필름은 이론적으로 500년을 버틸 수 있습니다. 영구할 거라 짐작되는 콤팩트디스크는 부식 현상으로 수명이 인간보다 짧습니다. 그러니까 제 아들이 제 모습이 담긴 영상을 CD로 확인하기 힘들 수도 있죠. 게다가 디지털 저장 장치는 적절한 리더기나 플레이어가 있어야 합니다. 독자들의 가정에 비디오테이프가 있어도 플레이어가 있는 집이 드문 것처럼 이런 저장장치는 또 다른 번거로움을 만들죠. 물론 반도체에 기록하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메모리 반도체 용량은 점점 커지고 속도도 빨라져 10초 만에 HD급 영화(5GB) 1편을 옮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1과 0으로 저장된 전자 장치가 수 백 년을 버틸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구태의연한 소리 같지만, 드라마에서 일기장으로 나온 종이와 지금까지 언급한 필름은 다른 매체에 비해 깊은 역사는 물론 보존성도 유리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불연속적인 숫자가 담지 못하는 그 빈 자리를 채워주는 농밀한 감성까지 있습니다.


최근 포켓몬 빵, 싸이월드 홈피가 부활한 모양입니다. 빵을 구하기 위해 편의점에 오픈런 open run을 할 정도라고 하며 홈피에 저장된 과거 사진이 부활하며 잃어버린 추억들을 다시 꺼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유행을 이끄는 건 MZ세대들이고 청춘 드라마도 완연 도화선이 됐습니다. 세상은 좋아지고 있지만 그 위의 삶은 점점 각박하다는 방증이겠죠. 질병과 전쟁 등으로 불황이 지속하고 노력해도 안 되는 세대, 체념을 먼저 배웠던 세대가 근심 없던 행복한 과거 시절을 기억하고 잠시나마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0과 1 사의의 무한을 기억하다

빛바랜 사진 속 과거들, 누군가에겐 한줄기 위안

어렵게 인화했던 사진에는 알수 없는 빛의 노출이 있었고 비록 선명했지만, 경계는 번진듯한 노란색 날짜가 사진마다 적혀 있었습니다. 날짜는 2002년 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손자인 제 아들을 돌보던 시기더군요. 짐작컨데 아버지는 제게 그랬듯이 손자에게 카메라 작동법을 알려줬던 것 같습니다. 사진은 4살 아들이 장난감으로 여기고 찍었던 것 같더군요. 한때 그 사진들이 생각나 다시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중하다는 건 잃고 나서야 깨닫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카메라가 아이의 방에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이의 의식 속에는 어릴적 추억과 함께 카메라와 할아버지가 연결돼 있겠지요. 그들의 소중한 추억이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그저 사진의 숫자만 남았을 뿐이죠. 그래도 제게는 사진 속 날짜조차 소중한 추억이고 위안입니다.


봄은 성큼 다가왔습니다. 척박한 시절에 자연의 풍경으로 위안을 받으려는 모든 이들은 디지털 기기를 들이대고 화면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볼 겁니다. 최근 휴대폰 카메라는 인공지능이 집약된 제품입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죠. 하지만 사람과 향기는 박리되고 영상은 디지털 장치에 맡긴 셈이죠. 이야기가 없는 불완전한 추억이고 언제 다시 들여다볼지도 모르는 소멸할 재료에 기억을 방치하는 셈이죠. 가장 훌륭한 저장 장치는 반도체가 아닙니다. 0과 1의 세상이 아니고 무한하게 삶의 밀도를 채울 수 있는 여러분들의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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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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