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명령에 노원평·삼각산 매복한 고언백, 승군과 맹활약
한양 외곽 공방전서 일본군 제압해 철수시기 앞당겨
1592년(선조 25) 4월 조선 전국토가 유린되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고, 선조는 북쪽으로 몽진(蒙塵)할 수밖에 없었다. 5월 초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했고, 조선군은 임진강으로 물러났다.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이 전열을 정비하는 사이, 6월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이 활약했다. 이로써 임진왜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전선은 소강상태에 빠지고, 조선의 관군은 빠르게 조직력을 회복해나간다. 1593년(선조 26) 2월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행주대첩 이후 조선군은 한양에 주둔한 일본군을 몰아내어야만 했다. 1593년 3월 조선군은 유성룡의 명령에 따라 노원평(蘆原平)과 삼각산(북한산) 일대에서 매복했다. 현재 노원구와 도봉구의 산록과 구릉지대에 해당한다. 당시 일본군이 부족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지역으로 출몰해 약탈을 한다는 정보에 따라, 조선군 병력을 규합해 연합작전을 구상했던 것이다.
3월 26일 진시(辰時), 즉 아침 7~9시였다. 일본군이 노원평과 우관동(우의동)으로 진출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군들이 공격을 가했다. 이어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의승장 유정의 군사들이 잇달아 공격했다. 조선군은 일본군을 한양 10리 지점까지 뒤쫓아가며 공격했고, 47명을 목베었다.
3월 27일 또다시 일본군이 수락산 방향으로 진출하자, 고언백(高彦伯)이 이끄는 군사와 승군(僧軍)들이 화살로 공격을 퍼부었다. 당시 조선군이 “높은 지형을 이용해 화살을 난사하였다”라고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들은 수락산과 불암산에서 매복해 일본군을 공격한 것으로 여겨진다. 3월에 조선군이 수행한 전투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 “이 전투가 행주산성 전투와 견줄만하다”라고 평가했다.
노원평 전투는 <징비록>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당시 전투에는 도원수 김명원, 황해도겸 삼도방어사 이시언, 평안좌방어사 정희립, 경기방어사 고언백, 순변사 이빈, 평안조방장 박명현, 조전장 박진남, 의승장 유정 등이 참가했다. 상대측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이끄는 일본군이었다.
또 일본군이 어떤 이유로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 동북방으로 진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로는 식량 부족에 따른 군량 확보가 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노원평 전투를 전후하여, 일본군이 정릉(貞陵)과 태릉(泰陵) 등을 침범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군량 확보와 더불어, 이를 핑계로 값어치가 있는 문화재 약탈을 감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원평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이는 경기방어사 고언백과 승군이었다. 고언백은 불암산에 위치한 불암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작성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언백에 쌓은 것”이라 되어 있지만, 실제 불암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소규모 성인 보루(堡壘)들을 쌓았는데, 수락산-불암산-봉화산-검암산-아차산에 이르는 서울 동북 능선에 보루를 쌓아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신라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아차산과 불암산에 신라식 산성을 쌓아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삼국시대에 이미 불암산에 산성이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고언백은 삼국시대 불암산성을 거점으로 삼아 새롭게 보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원평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언백은 원래 향리(鄕吏)로 무과에 올라 종군했던 인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고언백을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임명하고 능침(陵寢)을 보호하도록 했다. 고언백은 항상 여러 능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적이 나타나면 수시로 적을 쏘아 죽였다. 일본군이 태릉을 침범하자 이들을 격퇴하고, 24명을 참수했다. 그 공을 비변사가 선조에게 보고했다. 주변에 조선의 능침이 많았던 태릉 일대는 일본군의 약탈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고언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지형을 잘 이용해 매복작전을 펼쳐 성공했던 것이다. 결국 태릉 주변의 여러 능들을 보호할 수 있었고, 이에 고언백은 경기도방어사로 영전되었다.
당시 상황을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적이 태릉을 침범한 일이 있었는데, 언백이 그들을 쫓아버렸으므로 여러 능히 온전하게 되었다. 상(上)이 그의 공로에 상을 주고 여러 번 자급(資級)을 장려하였다.”라고 전한다. 고언백은 양주목사 시절 이미 수락산과 불암산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경험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593년 노원평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일대는 정묘호란 당시에도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유림(柳琳)은 태릉 아래에 말을 방목하고, 정릉 주변에서 나무를 베어 비난을 받았다. <인조실록> 인조 5년(1627)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백창이 아뢰기를 ‘유림이 태릉의 계하(階下)에서 말을 방목하고 정릉 주변에서 나무를 베어내어, 선왕의 능침으로 하여금 소나무와 잣나무에 가지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하고서도 장수가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1627년 1월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자 조선 조정은 대책회의를 했다. 임진강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으나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삼남(三南) 즉 충청·전라·경상도 군사들이 도착하면 이들을 통솔할 장수를 선정해 지키자는 것으로 논의가 귀결되었다. 이때 추천된 것이 충청병사(忠淸兵使) 유림이었다. 유림이 남방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북상해 태릉 아래 주둔하면서 말을 방목했던 것이다. 유림이 성스러운 공간인 태릉 아래에 말을 방목하고 정릉 주변의 나무를 벌목한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태릉과 정릉 일대가 대규모 기병이나 군사들이 주둔하기 용이하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지면서 노원평 일대는 도성의 동교(東郊), 즉 한양 도성의 동쪽 교외에 해당했다. 기본적으로 교(郊) 지역은 국왕의 직할지로서 사당, 능묘, 행궁 등이 많이 분포하며 국왕과 귀족들의 나들이가 많은 곳이다. 이러한 동교를 동서로 갈라놓는 것이 중랑천(中浪川)이다. 조선 국왕들이 선대의 능묘가 있는 불암산(태·강릉)이나 검암산(동구릉) 등으로 가려면 반드시 중랑천을 건너야만 했다.
중랑천의 중심에는 중랑포(中浪浦)가 위치했다. 중랑포는 중랑천의 지류인 우이천과 묵동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수심이 깊고 수량이 풍부한 곳이었다. 또한 백사장이 넓게 발달해 있었는데, 효종 때에는 북벌을 다짐하며 군사를 조련시키던 훈련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배를 띄우고 도강(渡江) 연습을 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중랑포는 중랑천 서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나루이자, 중랑천을 따라 한강으로 이어지는 수운이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는 중랑포에 배가 오르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역참과 봉수대도 설치되었다. 송계원(松溪院)은 한양에서 강원도로 부임하는 관리를 전송하는 역참이자, 국왕의 태·강릉 행차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봉화산(烽火山)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었는데, 동북방이나 동남방에서 오는 연락이 봉화산으로 연결되었다. 한양 도성의 동쪽에서 오는 모든 봉수 신호는 봉화산에서 받아 도성 내의 남산으로 전달해 주었다. 이처럼 노원평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 동쪽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불암사(佛庵寺)는 통일신라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크게 활약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주목사를 역임했던 고언백은 경기도방어사로서, 수락산과 불암산 그리고 노원평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불암사를 거점으로 하는 승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행주산성 전투는 권율이 산성 위주의 방어전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언백과 승군이 수행한 전투는 산성 방어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매복과 기습을 감행한 전투였다. 이러한 노원평 전투를 비롯한 한양 외곽의 공방전은 일본군의 활동 영역을 제한했고, 결국 이들이 한양에서 철수하는 시기를 앞당기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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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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