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뉴욕=조슬기나 특파원]뉴욕 맨해튼에서 지난 주말 나의 첫 끼니는 보르시(Borscht)였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 가정식이자 전통 수프인 보르시는 비트를 주로 사용해 진한 자줏빛을 띤다. 당근, 양배추, 콩 등 야채와 고기 건더기를 함께 푹 삶아내 목넘김이 부드럽고 속까지 든든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찾듯, 우크라이나인들은 보르시를 찾는다. 이런 보르시가 지난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반전’과 ‘우크라이나 지지’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외친다. "보르시를 만들자, 전쟁이 아니라(Make Borscht not War)." 보르시를 만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러시아 침공 결정을 규탄하고, 보르시를 먹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를 표한다.
맨해튼 이스트빌리지에 위치한 유명 우크라이나 식당 베셀카(Veselka)에도 매일같이 뉴요커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오전 일찍 찾아도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테이블에 앉을 수 있을 정도다.
1954년부터 3대째 영업 중인 베셀카는 보르시의 판매 수익금 전액을 우크라이나의 인도적 지원에 기부하고 있다. 침공 다음 날부터 줄이 늘어서기 시작, 약 3주간 판매된 보르시의 양은 이미 8000그릇을 돌파했다. 이는 무려 1000갤런 규모다. 맨해튼 업타운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 브라운는 "보르시를 먹기 위해 왔다"며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는 소식을 듣고만 있는 것이 힘들었다. 작은 연대의 표시"라고 말했다. 현금, 현물 기부도 쏟아지고 있다.
왜 많고 많은 전통 음식 중에서도 보르시일까. 베셀카의 직원인 타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음식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푸짐한 보르시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서부 출신인 그는 "보르시는 우크라이나에서 시작해 여러 레시피로 동유럽 각국에 퍼져 나갔다"면서 "‘강한 가족’을 상징하는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통상 일요일이면 큰 솥에 보르시를 끓여 가족들의 식사를 대량으로 만들곤 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보르시란 곧 ‘가정’이자 ‘가족’이다. 평범한 아침 식사부터 결혼식, 축제 자리에도 빠지지 않는 그들의 삶과 사랑 그 자체다. 옆 테이블에서 보르시를 주문한 한 여성은 "우크라이나의 모든 안주인에게는 그들만의 (보르시) 레시피가 있다"고 미소 지었다.
보르시를 둘러싸고 과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수차례 충돌이 있었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 우크라이나의 유명 요리사인 예브겐 클로보센코는 한국의 김장 문화처럼 보르시를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을 주도했고 이는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로 이어졌었다. 러시아 대사관에서 공식 사이트에 보르쉬를 만드는 동영상을 올리자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달려가 비판 댓글을 달기도 했다.
토요일 아침 갑작스레 이스트빌리지로 달려가 보르시를 주문한 것은 전날 밤 늦게 확인한 한 통의 이메일 때문이었다. 서툰 한글로 적힌 내용은 단 두 줄. 하지만 그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그밤 내내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있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동료 셰프들에게 보르시를 만들고 그 수익금을 우크라이나에 기부할 것을 장려하고 있는 클로보센코는 보르시를 '우리(우크라이나인)의 영혼'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전선에서 싸우든, 폭탄을 피하든 보르시를 먹을 때는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한 모금 먹을 때마다 우크라이나가 하나가 되고 모든 게 잘될 거라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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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이 순간, 모든 것이 잘 되길 바라고, 당신들의 가족들이 모두 안전하길 바란다는 글밖에 적을 수 없는 이 상황이 참담할 뿐이다. 그러니, 보르시를 드세요. 제발 전쟁을 멈추세요.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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