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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상실의 시대, 작위적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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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의 '기억의 밤'

[이종길의 영화읽기]상실의 시대, 작위적 슬픔 영화 '기억의 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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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진석(강하늘)은 삼수생이다. 공부를 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잔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 지난밤의 악몽이 오늘밤에도 계속된다. 인기척이 다가온다. 샤프펜슬을 집은 듯하다. 윗부분을 눌러 빼깍 소리를 낸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뾰족한 심이 눈을 찌를 것 같다. 진석은 그대로 얼어붙는다. 방문이 삐꺽 열리는 소리가 난 뒤에야 슬며시 눈을 뜬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황소숨을 토해낸다. 형 유석(김무열)을 의심한다. 새 집으로 이사 온 날 밤 납치됐다가 19일 만에 돌아오더니 사람이 변했다. 집을 떠나있던 기간의 기억을 잃었단다. 유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름하다. "진석아, 어제 약 안 먹었지?"

[이종길의 영화읽기]상실의 시대, 작위적 슬픔 영화 '기억의 밤' 스틸 컷


장항준 감독(48)이 연출한 '기억의 밤'은 미스터리 스릴러다. 일상적 소리에 기괴한 음악을 더해 진석의 혼란을 극대화한다. 동화, 영화 등의 독특한 설정도 빌렸다. 가족들이 진석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방은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 속 금지된 방을 연상케 한다. 성주인 푸른 수염과 결혼한 여인은 출입이 금지된 아래층 복도 끝의 방에서 이전 부인들의 시신을 발견한다. 기억의 밤에서는 진석이 20년 전 살인을 저지른 곳이다. 납치됐다가 19일 만에 돌아오는 유석은 M. 나이트 샤말란 감독(47)의 '빌리지(2004년)' 속 루시우스 헌트(호아킨 피닉스)를 닮았다. 마을 청년인 노아 퍼시(애드리언 브로디)가 정신질환을 앓자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숲 너머 마을로 향한다. 그가 공포에 짓눌려 돌아온 뒤 마을에서는 괴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집집마다 현관에 붉은 피가 칠해지고, 생가죽이 벗겨진 여우의 사체들이 곳곳에서 널린다. 기억의 밤에서 진석은 유석이 돌아온 뒤 극심한 신경쇠약을 앓는다. 기억이 실제인지 과대망상인지는 불분명하다.

[이종길의 영화읽기]상실의 시대, 작위적 슬픔 영화 '기억의 밤' 스틸 컷


이상야릇한 흐름은 오래가지 못한다. 내러티브가 사건의 실체를 추리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드라마로 전환된다. 장항준 감독은 "스릴러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했다. "전통적인 중산층 가족이 급격히 해체되던 상실의 시대를 조명하고 싶었다. 스릴과 서스펜스로 달려가는 막다른 종착역에 우리들의 슬픔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1997년 11월이다.


진석은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는다. 중태에 빠진 형만큼은 살려내려고 하나 수술비를 마련하기가 어렵다.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전부터 돈이 없었다. 아내를 죽여 달라는 유석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살인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장항준 감독은 이 청부살인이 IMF로 싸늘해진 사회를 대변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유석의 아버지는 종합병원 의사다. 남부럽지 않은 2층 집도 소유했다. 살인을 망설이는 진석에게 "얼마면 가능하겠냐"고 묻기도 한다. 유석 아버지와 같은 상류층이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을 부탁한다는 설정은 강남 부동산 매물이 헐값에 쏟아지는데 현금이 부족할 때나 가능하다. 유석 아버지는 감정에 호소할 뿐이다.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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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상실의 시대, 작위적 슬픔 영화 '기억의 밤' 스틸 컷


IMF는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대기업이 고용을 기피하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소득분포가 상위와 하위로 몰리는 양상이 짙어졌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고 사회의 일부 집단에 편중된 것이다. 파고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는 1998년이다. 많은 이들이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운영하던 회사를 잃었다. 상처는 가정파괴로 이어졌다. 신문과 방송에 노모와 아이를 버리는 사건이 하루가 멀다고 보도됐다. 특히 편부모가 아이를 보육원에 맡겨뒀다가 발길을 끊는 일이 잦았다. 그해 7월 가정폭력방지법이 발효됐을 정도로 가정폭력도 증가했다. 애정과 연민, 연대, 우애와 같은 가치를 폐기해버린 사회에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전쟁만 존재한다. 20년이 흐른 지금, 상처는 양적 개선으로 극복된 듯 보인다. 하지만 질적 악화가 동반돼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다. 특히 청년층이 불이익에 노출돼 있다. 불안한 미래와 낮은 급여로 가정을 꾸리기조차 쉽지 않다. 최면에 걸렸다지만 여전히 공부에 전념하는 진석처럼.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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