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11월30일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로 순국하며 풍전등화의 국가 위기를 전 국민에게 알렸던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선생의 기일(忌日)이다. 선생에 대한 추모는 당대에도 이어졌으며 광복 후에는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오늘날에는 선생의 시호를 따서 붙인 '충정로(忠正路)'란 지명을 통해 이름이 전해져 오고 있다.
충정공이란 시호를 받기 이전, 즉 생전 정치인으로서의 민영환은 당시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여흥(驪興) 민씨 척족의 일원이자 고종의 측근 대신이었다. 민영환의 아버지인 민겸호(閔謙鎬)는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자 고종의 외삼촌으로 당시 민씨 척족 세도의 1인자였다. 민영환은 이후 큰아버지 민태호(閔泰鎬)의 양자로 입양됐으며 17세인 1878년,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 한 후 관료가 돼 정계에 입문했다. 민씨 일가의 후광 속에 입신한지 불과 3년만에 동부승지, 이듬해인 1882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의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친아버지 민겸호가 1882년 임오군란 때 사망하면서 잠시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기도 했다. 민겸호가 임오군란 당시,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와 횡포에 앞장섰던 탐관오리란 이유로 살해당했고, 민영환도 표적이 됐었지만 살아남았다. 2년 후 복직돼 다시 고위직을 역임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다시 민겸호의 아들이란 이유로 처단 대상에 오르기도 했지만, 주로 조정에서 고위직을 맡고 지방직을 거의 맡지 않았던 민영환이 탐관오리로 활동했던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주로 아버지와 민씨 척족의 악명으로 인해 처단해야 할 탐관오리로 지목됐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청일전쟁, 뒤이어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면서 다시 사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896년 5월, 고종의 명을 받고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돼 러시아로 파견됐다. 당시 러시아의 신임 황제로 등극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여함과 동시에 러시아와의 외교적 협상에 나서기 위함이었다. 민영환은 외교적으로는 대표적인 친러파 인사로 1886년부터 청과 일본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맺을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기도 했었다.
이때 민영환은 일본의 요코하마로 이동해 태평양을 횡단, 캐나다 벤쿠버를 거쳐 미국으로, 다시 미국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뉴욕으로 가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러시아로 갔다. 이 6개월이 넘는 긴 여정을 거치면서 서양문물과 제도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하는데, 이때의 소회는 여행기인 '해천추범(海天秋帆)'에 남기기도 했다. 이듬해인 1897년에는 다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에 가기도 했다.
서구문물과 제도를 직접 본 이후, 민영환은 개화정책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유럽 열강의 공화제, 민권 신장 등을 지속적으로 고종에게 상소했지만, 당시 전제군주정 형태의 대한제국을 꿈꾸던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영환은 이후 독립협회를 후원하며 개혁파를 옹호하고 의회 수립을 꾀하기도 했지만 국왕의 친위세력들에게 탄핵당해 파직당하기도 했다. 결국 의회수립은 좌절되고 말았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도 어떻게든 국체를 수호하려는 그의 노력은 계속 전개됐지만,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력이 강대해진 친일파 관료들과 황제의 권위 세우기에만 바빴던 고종황제의 틈바구니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민영환과 함께 친러파 인물로 알려져있던 이완용이 친일파로 변심, 이후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파 매국 세력들과 대척점을 이루고 외로운 싸움을 지속해야했다. 결국 친일내각에 의해 지금의 부총리 격인 의정대신에서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좌천당했다.
이후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금의 총리격인 의정대신이던 조병세와 함께 늑약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규합,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공동 상소를 올렸으나 조병세는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고 대신들은 강제 해산당했다. 민영환은 황명 거역죄라는 명목으로 견책을 당하자 11월30일, 이에 격분해 자신의 명함에 유서를 남기고 결국 자결했다. 유서는 본래 '2천만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과 각국 외교 사절들에게 보낸 것, 고종황제에게 보낸 것 등 3가지였다.
지금 뜨는 뉴스
그의 죽음은 큰 파장을 몰고 왔는데, 외교가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라 각국 외교관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조문했다. 심지어 을사조약 조인에 앞장선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당시 주한 일본공사도 조문을 왔다. 상여가 나가는 날에는 온갖 백성들과 걸인들, 심지어 사찰의 승려들까지 나와서 곡을 하고 전송하는 바람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으로 나라의 위기 상황을 확실히 알린 셈이 됐으며 향후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고 있다. 대부분 친일파로 돌아선, 고종의 최측근 대신들과 민씨 척족 중 유일하게 죽음으로 망국의 책임을 지고자 했던 것도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