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속상하시겠네요. 점심이지만 그냥 소주 한 잔 드릴께요"
광화문에 들렸다가 근처 공기업 부장으로 근무하시는 고객님을 만났습니다. 최 부장은 1남 2녀의 장남으로 벌써 2년째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아버님 병원비 전체를 강담하느라 가족들의 화목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상황입니다. 4년 전 시골에서 아버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에는 여동생과 함께 각각 70만원씩 각출해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2년 전 막내 여동생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시작됐습니다. 막내의 부담은 자연스럽게 오빠인 최 부장에게 이전되었습니다. 불만이 있었던 부인을 다독이며 지내왔지만 작년부터는 둘째 여동생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전체 병원비를 혼자 부담하게 되었고 그 이후 하루 하루의 삶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의 사교육을 최대한 줄이면서 지내왔지만 어느새 마이너스 통장의 한도가 가득 차게 됐으니 지금은 부부갈등까지 겪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주말 어머님 기일도 있고 해서 아버님 병문안을 갔었는데, 거기서 둘째 여동생과 제 아내가 크게 싸워버렸네요."
이미 시누이와 몇 번의 전화통화로 사이가 멀어지면서 서로 왕래가 끊겼던 여동생을 아버님 병원에서 만난 것이 큰 화근이 됐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내색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끝내 참지 못하고 시누이와 올케가 다투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3명의 자녀가 나누어서 부담하는 것 자체도 미안해 하셨던 아버지에게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만남에서 시작된 싸움이었지만 가장 큰 충격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님은 한 참을 아무 말씀이 없다가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자식들 싸우게 만드냐"하시면서 무조건 당신을 퇴원시켜 달라고 하셨으니 최 부장은 더 난감하게 됐습니다.
"명로씨, 제가 정말 속상한 것은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제발 퇴원 좀 해주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거에요. 평생을 저를 위해 헌신하셨는데 저는 그 병원비 2년 정도 냈다고… 정말 저 나쁜 놈이죠?"
담당 라이프플래너인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드리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나의 의지나 계획과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한 두 번의 큰 돈이 아닌 지속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비용이라면 왠만한 부자가 아니라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됩니다. 미리 도움되는 보험이라도 들어놨으면 하는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후회일 뿐입니다.
올 해 85살이 되신 우리 어머님도 시골에 혼자 살고 계십니다. 어머님 생각에 간만에 전화를 드리니 경로당에서 우리 어머님 열심히 10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계시네요. 어렸을 적에는 허리 아프게 10원짜리 고스톱을 못하게 짜증도 냈지만 이제서야 그렇게라도 치매를 예방해야 한다고 하시는 어머님의 고마운 마음을 알게 됐네요. 부모가 돼야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설날에 찾아 뵌 지 벌써 3개월이 됐으니 4월이 가기 전에 시골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이명로 푸르덴셜생명 이그제큐티브 라이프플래너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