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기는 페미니스트'로 이름이 알려진 'Yangpa(양파ㆍ본명 주한나)' 작가의 강연회에 다녀왔다. 한 번은 그의 새 책 '여혐민국'의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에서 기획한 자리였다. 다른 한 번은 강남 구글캠퍼스에서 열린 '코딩하는 여자들'의 행사 '위민 테크메이커스 2017(WTM17)' 컨퍼런스였다. 두 자리 모두, 가히 종교 부흥회를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주한나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랐고, 영국에서 살고 있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다. 외국인 남편과 결혼해 두 아이를 두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활동하는 스타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옥스포드 대학 석사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여성 엔지니어라고 하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라는 오해를 받는다고. 하지만 부모님의 사업 실패 후 고졸 학력으로 생업에 뛰어들어 여기까지 왔다고. 그 과정에서 여성이라고, 외국인이라고, 어리다고, 애엄마라고, 저학력이라고 차별 받지 않은 건, 더 나은 노동조건을 가능하게 해 준 페미니즘 덕분이었다는 거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곳을 떠난 그가 한국 여성들의 현실에 목소리를 높이는 건, '로또에 여러 번 당첨된 것 같은 그의 행운'이 사실은 다른 여성들도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조건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고 했다.
얼굴을 모르는 작가의 포효에 열광해왔던 여자들이 200여 명이나 모였다. 제한적으로 신청을 받았는데 번개처럼 마감됐고, 무작정 현장에 나타나 서서 듣는 이들도 있었다. 금쪽 같은 금요일 밤, 강남 한복판이었다. 세 시간으로 예정된 행사는, 관객과의 질의응답에만 두 시간을 썼다. 그는 "해외취업을 꿈꾸지만, 다른 나라에서 사는 일이 두려워 망설여진다"는 젊은 여성의 말에 "언어장벽과 문화차이와 인종차별, 그 모든 걸 다 합쳐도 한국에서 받는 성차별보다 낫다는 동료가 있다"며 격려했다. 다양한 주제의 젠더 이슈를 품고 지치지도 않고 손을 드는 여자들을 보며, 그 자리에 필자를 초대한 친구는 말했다. "여자들이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 오른 것 같아." 생리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날에는 코딩하는 여자들이 모여, 동료 여성 프로그래머들의 경험담을 나눴다. 구글이 기획한 '워먼테크메이커스2017(WTM17)' 행사였다. 황금 같은 토요일 낮, 강남 한복판에 다시 200여 명의 여자들이 모였다. 이번에는 신청기간을 놓친 필자가 무작정 찾아가 청해 들은 거였다.
WTM17의 진행요원들은 절반이 남성이었다. 자신들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일인데도 열심이었다. 아무리 지극한 페미니스트라도, 남성은 여성이 생태적으로 아는 일들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축 늘어진 생리대의 불편함이나 자궁벽을 헐어 생굴을 낳는 것 같은 불쾌감, 뇌가 흔들리고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 아기가 들어있는 거대한 배가 방광과 다리와 모든 기관을 압박하는 고통, 부푼 배를 안고 지하철과 직장을 오가며 견뎌내야 하는 시선들, 그리고 마침내 내장이 회오리처럼 쏟아져 나오는 듯한 출산의 순간과 그로 인한 존재 안팎의 변화를, 여성들만큼 절실히 경험할 수는 없는 거다.
생물학적인 차이만도 이럴진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갈등과 '느낌'의 문제들을 여성들만큼 '민감하게' 캐치하기는 힘들 게다. 그 차이에 눈 뜨고 스스로 예민해져서, 자청해 불편을 감수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늘어나고 있는 걸 보니 뭉클했다. 여자를 슬프고 힘들게 만드는 사회는 남자 역시 슬프고 힘들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남성들 역시 피해자인 셈이다.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어디가, 무엇이 해피엔딩인지, 언제쯤, 어떻게 거기 닿을지 모르는 아득한 길 위에서 여자와 남자는, 우리들은, 조심스런 변화들을 함께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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