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車·수레 행렬 이어진 국경…트럭 日 250대 통과하고 출퇴근 노동자 줄이어
태국, 국경지대 주변 특별경제구역(SEZ) 지정하고 집중 개발
노령화 태국은 국경 통해 인력·물자 충전, 성장 더딘 주변국엔 경제 돌파구
[사깨우(태국)=아시아경제 이혜영 기자] # 섭씨 38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도로 위를 나무수레와 오토바이, 트럭이 쉴새없이 지나간다. 닦을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을 아스팔트에 쏟아내며 수레를 끌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어디론가 향한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검문소다. 그리고 작은 종이에 간단한 신상을 적고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한다. 여권을 가진 사람은 이 과정조차 생략하고 인파에 섞인다. 국경경비대원이 종이에 적힌 내용이나 여권을 훑어내린 후 '통과!'라고 말하자 수레를 잡은 이들은 몇 분 새 태국을 넘어 캄보디아로 향한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은 바코드를 스캔하고, 트럭 운전자들은 차량 정보를 간단히 기입한 서류를 낸 뒤 국경을 넘는다.
태국 수도 방콕에서 동쪽으로 250km 떨어진 사깨우주(州)의 아란야프랏텟 국경검문소. 양국의 국기가 나란히 있는 이 작은 검문소를 통과하면 어느새 태국은 캄보디아가 되고 캄보디아는 태국이 된다. 이곳에선 비자나 관세 없이 두 나라 국민들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간다. 생필품과 각종 자재 등 다양한 물건이 국경을 넘어 태국에서 '수출'되고 불과 몇 분 후 캄보디아로 '수입'된다.
◆ 삶과 꿈의 터전 '국경'= 지난 10일 방콕에서 3시간을 달려 국경검문소가 있는 롱끄리아시장에 도착하자 짐을 한가득 실은 트럭과 오토바이,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차도와 인도를 가득 메웠다. 태국 최대 연휴인 송끄란을 불과 3일 앞둔 탓에 국경을 오가는 물량이 폭증하면서 평소보다 붐비는 모습이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개방된 국경을 통과한 트럭은 이날 하루에만 250대에 달했다. 오후 1시가 되자 태국 쪽 도로가 꽉 막힐 정도로 사람과 차가 뒤엉켰다. 출입국이 일상이 된 태국과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국경은 단순한 경계를 넘어 삶의 일부가 됐다.
온 가족이 국경지대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태국인 피야홍(52)씨는 "최근 들어 국경 무역이 늘고 활성화되면서 한 곳에서 시작한 가게를 이제 세 군데로 넓혔다"며 "송끄란 축제에서 사용할 물총이나 폭죽은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말했다. 같은 기간 캄보디아 역시 연휴를 맞은 탓에 태국에서 물품을 공수해 가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캄보디아 국적으로 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시카(25)씨는 국경무역 덕분에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이날도 태국 도매상에게서 사온 물건을 수레 가득 쌓아올린 채 국경을 넘었다. 그는 "국경을 통해 물건을 넘겨주면 한 번에 1000바트(약 3만3000원) 정도를 남길 수 있다"며 "캄보디아에서는 이만한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아 학비를 벌기 위해 국경을 오가고 있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경제발전이 더디고 생산기반이 약한 캄보디아는 주요 공산품과 생필품을 육로를 통해 태국에서 공수해간다. 태국에서 콜라나 우유 가격이 오르면 캄보디아에서 몇 배가 뛴 값에 거래될 만큼 두 나라는 국경을 통해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이런 풍경은 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라오스, 미얀마에서도 펼쳐진다. 태국 북부 딱주(州)의 도시 매솟(Maesot)은 매일 아침 미얀마에서 출근하는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매솟은 미얀마의 미야와디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미얀마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태국으로 온다. 현재 약 500만명에 달하는 미얀마인들이 태국을 오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상당수가 육로로 국경을 넘어 일터로 향한다. 미야와디와 매솟을 오가는 노동자만 하루에 5000명에 육박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유일한 내륙국가인 라오스도 사반나케트와 훼이싸이 등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을 통해 국가 간 경계를 허물고 있다. 덕분에 마약 생산과 거래로 악명 높던 메콩강의 골든트라이앵글(라오스·태국·미얀마)과 인도차이나반도는 서로의 국경을 발판 삼아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길을 얻게 됐다.
◆ 역내 통합 시동 거는 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에 속한 나라의 국민들이 국경을 넘나드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동남아시아의 허브(Hub) 격인 태국에는 총 54곳의 국경검문소가 있다. 각 검문소는 사람과 오토바이, 차가 다니는 길을 분리했다. 원활한 무역을 지원하기 위한 오랜 경험이 이런 검문소 풍경을 만들었다. 국경을 통한 아세안 국가 국민들의 왕래는 2015년 12월 아세안 10개국이 단합해 아세안경제공동체(AEC)를 공식 출범시키면서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해졌다.
2015년 기준 아세안은 6억명이 넘는 인구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6위, 무역규모 4위의 거대한 공동체로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에 맞서는 경제규모를 자랑한다. 서로 다른 국가별 성장 속도와 정치ㆍ사회적 상황 속에서 완전한 통합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인식한 듯 아세안은 경제공동체 논의를 시작으로 제도적인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아세안은 상품무역협정(ATIGA)을 통해 관세를 철폐하고 비관세장벽 완화, 원산지 규정과 기술표준 개정 등 역내 무역규모를 늘리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세안-6'로 분류되는 태국,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는 품목 수 기준 99.2%가 무관세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후발 4개국은 90.9% 수준의 관세 철폐를 이뤄내 아세안 전체로 볼 때 평균 95.99%의 무관세율을 기록하고 있다.
또 무역 관련 국가별 단일창구를 만들어 제도적 뒷받침을 강화하고 있다. 아세안-6 국가와 베트남은 국가단일창구(NSW) 구축을 완료해 기업이 세관, 출입국관리소,항만사무소 등 각 기관에 별도로 신고하던 절차를 통합했다. 일부 국가는 이를 아세안 단일창구와 연계해 역내 원산지증명서(ATIGA FormD)와 아세안 세관 신고서류 등을 공유하고 있다.
경제통합의 한 축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기 위해 역내 국가들은 무비자협정을 맺고 주요 국제공항에 아세안 국가 국민들의 출입국을 간소화하기 위한 '아세안 레인(ASEAN LANE)'이라는 별도 창구를 마련했다. 또 태국 정부는 미얀마와 라오스 등 인접국 사람들에게 '핑크 카드'나 '아세안 카드'로 불리는 허가증을 발급, 일정 기간 안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자국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완하고 있다.
유타나 풀삐팟 아란야프랏텟 세관장은 "태국에서 캄보디아를 포함, 다른 아세안 국가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며 "AEC 출범과 더불어 제도가 정비되고 도로 등 인프라 여건이 개선되면 이 같은 움직임은 더 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 국경 넘어 세계로= 태국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무역은 연간 850억바트(약 2조80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국경지대는 비공식적인 거래가 더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제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크다. 국경에 노동과 물자가 몰리면서 각국 정부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특별경제개발구역(SEZ)을 지정하고 입주기업에 법인세를 포함한 각종 세제 혜택을 주고 있다.
특히 태국은 2015년부터 국경지역인 딱주와 사깨우주를 포함한 10곳에 SEZ를 지정해 아세안시장에서의 공급, 생산, 소비 사슬 연계에 발 벗고 나섰다. 태국 정부는 이들을 다시 1차(5곳)와 2차(5곳)로 나누고 각 지역과 경계에 있는 국가들의 특성을 고려해 집중산업 분야를 선정, 세분화했다. 동부경제회랑(EEC)과 아시안하이웨이, 첨단산업을 앞세운 '태국 4.0'과 같은 주요 정부 정책과도 연결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중동을 넘어 유럽으로 뻗어나가는 전략을 세웠다.
매솟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송성수 싸이터스 타일랜드 사장은 "주변국이 경제개방을 하고 국경무역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며 "인력과 물자의 이동이 노령화한 태국 경제에는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성장이 더딘 아세안 국가엔 돌파구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가 시작된 후 한국에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중국을 언급하며 "아세안 국가들이 포스트차이나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혜영 기자 itsm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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