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대지진·중국과 통상마찰 후 아세안 최대 투자국 부상
中 해양실크로드 구축 밑그림···동남아 전략적 거점 삼아
韓 대기업 중심 진출에 제조업 편중·내수 공략 과제
[아시아경제 이혜영 기자] #2015년 중국과 일본은 인도네시아 자바섬 고속철도 수주 경쟁을 벌였다. 치열한 경쟁 끝에 중국이 승리하자 일본 정부와 언론은 패인 분석에 열을 올렸다. 사업을 따낸 중국은 자체 차관을 투입했고 인도네시아는 막대한 국가예산을 절감하고 핵심 인프라 구축 기반을 마련했다.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연합ㆍASEAN)을 주목하는 건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이 지역에 전략적으로 진출해 상당한 기반을 마련했다. 일본의 동남아 진출 역사는 수십년에 이른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앞세운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 막대한 자본을 아세안 국가에 쏟아 부을 태세다.
◆판 키우는 일본·중국= 2011년 일본 동북부 지역을 휩쓸고 간 대지진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변수 앞에 세계 경제대국 일본의 위상은 흔들렸다. 혼란과 위기에 내몰린 일본 정부와 기업이 주목한 곳은 동남아시아였다. 정부개발원조(ODA)로 1970년대부터 동남아에서 영향력을 키워 온 일본은 대지진 이후 본격적으로 이 지역 투자를 늘려 '일본 너머의 일본'을 개척했다. 대안을 찾던 일본과 성장엔진이 필요했던 동남아가 본격적인 동반자의 길을 걷게된 것이다.
4일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에 따르면 2015년 한 해동안 일본이 아세안에 투자한 금액은 202억4400만달러(약 22조7400억원)에 달한다. 일본은 2011년 196억달러를 투자해 100억달러 고지를 달성한 뒤 2013년 처음으로 아세안 투자 200억달러를 돌파했다. 2005년 이후 10년간 일본은 304%에 육박한 투자 성장률을 보이며 아세안 국가에서 광폭 행보를 보였다.
단기간에 일본이 아세안 최대 투자국으로 부상한데는 중국과의 긴장관계도 한몫했다. 일본은 2012년 9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영토 분쟁이 격화하면서 이 시기를 전후로 중국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거점을 모색 중이었다. 중국과의 분쟁에서 출혈이 불가피했던 일본은 생산기지를 동남아로 이전하고 교역 다변화를 꾀한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전면에 내세웠다. 동일본 대지진과 중국과의 통상마찰, 신흥국 시장 개척 필요성을 동시다발적으로 마주하게 된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동남아 진출을 장려하며 위기 돌파에 나섰다. 오랜 기간 동남아에 공을 들여 온 일본은 현재 제조업을 필두로 금융업, 서비스업, 유통업 등 산업 전 분야가 동남아 시장에 진출해있다.
중국도 아세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2013년 시진핑 주석이 천명한 '일대일로'의 한 축인 '21세기 해양실크로드'에서 동남아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다. 중국은 동남아와의 스킨십을 늘리기 위해 경제협력과 전략적 상호신뢰관계(strategic trust)구축이라는 기본방향을 세웠다. 중국은 아세안 국가들과 '2+7 협력 프레임워크'라는 구체적인 전략을 추진하며 이를 현실화해왔다. 중국 남부 쿤밍에서 동남아 주요국을 잇는 '쿤밍-싱가포르 철도' 건설이 대표적인 예다. 중국은 이 철도가 지나는 라오스와 태국 등에 차관을 제공하거나 대규모 투자를 하며 아세안 전체 그리고 개별 국가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있다.
중국의 아세안 투자규모는 2015년 기준 146억400만달러(약 16조3300억원)다. 최근 인프라 투자 등이 확대되면서 직전연도보다 87%가량 큰 폭으로 상승했다. 중국의 전세계 투자에서 아세안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0년 이후 5년간 6~7%대였지만 2015년 기준 10.0%를 기록했다. 중국의 동남아 중시 전략이 투자 비중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중국은 또 지난해 57개국이 참여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주도적으로 설립하는 등 아태지역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중국의 입김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글로벌 각축장 된 아세안= 일본과 중국의 아세안 중시 전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등장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특히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양국은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을 둘러싼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 RCEP는 한국과 중국, 일본, 호주 인도 등 아세안 10개국을 포함 총 16개국이 참여하는 거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RCEP는 2013년 5월 첫 협상을 시작했지만 관계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계산 속에 더딘 진행을 보였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고 보호무역 기류가 형성된 것이 RCEP에는 오히려 기폭제가 돼 현재 제17차까지 공식협상이 진행됐다. 중국은 관세장벽을 낮추는 기본적인 수준의 협약을, 일본은 TPP 수준의 지적재산권과 노동자 인권, 환경 관련 규정을 포괄하는 높은 단계의 협약을 주장하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본과 중국이 세계경제의 33%를 차지하는 RCEP를 둘러싸고 아시아 무역통제권에 대한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양국은 RCEP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영향력이 큰 인도네시아와 올해 아세안 순번 의장국인 필리핀을 대상으로 여론전을 펼치는 등 치열한 물밑 외교를 벌이는 중이다. 특히 중국은 연내 RCEP 타결을 목표로 잰걸음을 하고 있다.
2015년 말 아세안경제공동체(ASEAN Economic CommunityㆍAEC)가 출범하면서 유럽연합(EU)과 미국 등 주요 선진국도 이 시장을 주목하고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등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도 이미 '포스트 차이나'로 아세안을 주목하고 삼성과 LG,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진출해있는 상태지만 제조업 편중과 내수시장 공략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오윤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동남아대양주 팀장은 "일본은 일찌감치 자국 주도 지역생산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중국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동남아의 주요 인프라 투자자로 부상하고 있다"며 "한국은 베트남을 중심으로 주요 생산기지를 확립하고 있지만 중국과 일본의 경쟁 심화로 대응을 고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혜영 기자 itsm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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