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던 날 오후 페이스북에 짧은 글은 남겼다. '봄을 봄' 드디어 봄이 왔다고, 완연한 봄을 이제야 보았다는 개인적 선언이었다. 그 후로 2주가 흘렀고 곧 올 것 같았던 봄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분명 봄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봄이 오긴 오는 걸까?
지난 주말 춘천에 사는 한 지인이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시비를 건다. 늦은 오후였는데 살짝 말이 꼬이시는 걸로 미루어 짐작컨대 낮술을 한 모양이다.
'정교수, 그 날 봄을 봄. 그렇게 썼지요? 그거 확실해요? 그 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소?'
투정하는 그를 달래며 답을 곧 드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글은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봄이 왔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
봄. 영어로 스프링. 뭔가 말려있던 것이 힘차게 튀어 오르는 모습이 떠오른다. 새싹을 뜻하는 sprout도 어원이 같다. 풀이나 나무에 새로 돋아나는 싹을 우리말로 '움'이라고 한다. 아직은 작고 약하지만 창대한 미래를 접어 간직한 새싹이다. 봄의 징조를 살피려면 움이 도처에 있느냐를 잘 관찰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 새싹들이 있는가? 움이 돋아 있는가?
돌아보니 파릇파릇한 움[sprout] 대신 무거운 움[weeping]이 보인다. 차가운 동거차도의 바다 속에서 긴 시간을 견뎌온 세월호가 거짓말처럼 떠올랐고 세월에 난 세월의 상처를 보고 남겨진 자들은 또 운다. 울음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집단적이기도 하다. 미수습자 부모는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울고 유가족이 된 부모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자식을 마음에 품고 운다. 그들의 울음은 현재진행형이고 영원히 과거완료가 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도처에 울음이 가득가득한데 봄이 오긴 오는 걸까? 이 눈물의 홍수 속에 새싹은 어디 있을까?
어쩌면, 새싹[움]에 눈물[움] 담겨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 두 움이 다르지 않고 같은 봄을 증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울음이 터지는 날 오랫동안 기다렸던 움이 트고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필 것이다. 봄은 그렇게 움[sprout]이 틀 때, 움[weeping]이 터질 때 홀연히 우리 곁으로 올 것이다. 봄이 올 것이라는 첫 번째 증거. 도처에 움이 가득하다!
'트다'라는 말을 다시 보자. 트다라는 말은 타동사로 '막혀 있던 것을 치우고 통하게 하다'라는 의미이고 자동사로는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뜻이다. 움이 트는 모습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차원으로의 변이(transformation)이다. 새로운 세상으로의 혁명이다. 움이 트면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생명의 실체가 꿈틀거리며 성장하고 울음을 터트리면 가슴속에 담고 있던 슬픔의 실체가 세상으로 뚫고 나와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하지만 트는 행위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랜 숙성과 기다림, 그리고 적절한 수분과 넉넉한 태양, 무엇보다 쉼 없는 계절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고통이 수반되는 움틈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잔인한 행위이다. 자신의 몸을 찢어야 겨우 싹이 뻗기 때문이다. 고통 없이 새로운 세상이 오겠냐만 우리가 지금껏 지나온 겨울은 너무 추웠고 혹독했다. 추웠던 만큼 따듯한 봄이 더 그립고 더 고마울 것이다.
봄의 증거, 움[sprout, weeping]이 지천에 있다. 움을 틔우기 위한 우리들의 수고도 쌓이고 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과 같다. 간절히 바라지만 종국에는 도래하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 결국에는 겨울은 가고 봄이 올 것이라는 단단한 결기. 아무리 부정하고 막으려 해도 봄은 지척에 있다. 눈물이 터지고 움이 트는 그 날 우리는 봄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함께 우는 날, 그 날 봄은 불현 듯 오고야 말 것이다.
정용철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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