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충훈 기자]"그때 주인은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스프를 먹고 있었지. 나는 그의 발밑에서 낡은 공을 가지고 장난을 쳤어. 방은 따뜻했고 창밖으로 눈이 내렸던 것 같아"
강아지도 과연 예전에 좋았던 시절을 기억할까요. "그럴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발표됐습니다. 학술지 현대 생물학(Current Biology)에 이달 초 게재된 헝가리 외트뵈스 로렌드 대학의 연구 논문에는 개들도 사람처럼 과거의 경험을 장기 기억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담겨 있습니다.
이 장기기억은 일화적 기억, 혹은 에피소드 기억(episodic memories)이라고 합니다.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떤 감정과 함께 회상 할 수 있는 기억 능력입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훈련을 통해 얻는 조건반사적 기억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 연구는 개가 에피소드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학문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사람은 어제의 날씨나 식사 메뉴를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데요. 이렇게 일상 속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뇌에 기록돼 있다가 장기적인 에피소드 기억으로 저장됩니다. 연구팀은 개도 사람처럼 우발적인 기억을 기록해뒀다가 장기 기억으로 저장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쉽게 말해,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과거를 개가 자연스레 기억할 수 있느냐를 입증하는 게 연구의 목적이었습니다.
연구를 이끈 사람은 반려견 조련학자 클라우디아 푸가자 박사인데요. 그녀는 '날 따라해(Do As I Do)'라는 새로운 반려견 조련법을 창시한 사람이죠. 개도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며 사회적인 학습을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입니다.
이번 실험 역시 '날 따라해' 조련법이 사용됐습니다. 총 17마리의 개들이 실험에 참가했는데요. 연구진은 먼저 개 앞에서 직접 특정한 동작을 수행한 뒤에 "날 따라해"라고 구령을 붙였습니다. 이 동작들은 우산을 만지거나 의자를 발로 건드리는 등 개도 충분히 따라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호령을 붙이긴 했지만 억지로 개에게 해당 동작을 기억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 따라해"라는 구령을 붙이지 않고, 개에게 "엎드려" 동작을 훈련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구진은 개에게 에피소드 기억이 저장됐는지를 알기 위한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연구진은 불시에 개에게 "엎드려" 동작을 시킨 후 "날 따라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개들은 당황하면서도 상당히 높은 확률로 맨처음 사람이 보여준 동작들 중 하나를 따라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자신은 해본 적이 없는 동작을 행한 것입니다. 마지막 테스트는 첫번째 동작을 보여준 뒤 1분~1시간 사이에 갑자기 시행했습니다만 개들은 처음 봤던 행동을 계속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개들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동작을 잘 기억하는 것은 개들이 에피소드 기억에 의지해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결론내렸습니다.
푸가자 박사는 이 실험에 대해 "개들이 다른 사람이 한 행동으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지 시험한 첫 시도"라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이 연구로 인해 개 뿐만 아니라 여러 동물들이 자아와 비자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P.S. 집에 강아지 빼곤 아무도 없다며 거실에서 깨방정 춤을 췄던 분들이라면 살짝 뜨끔할 소식이네요.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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