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는 영국에 살아요 여덟 살 소녀 애니는 17세기 에든버러에 살아요 왕족의 거리 로열마일 뒤편 막다른 골목에 살아요 백 년 후 사람들의 발밑에 묻힌 지하 도시에 살아요 흑사병으로 매몰된 영혼들 속에 살아요 애니는 멀쩡하게 버려졌어요 의사들은 묵묵히 지켜보다가 숨이 죽은 배추 잎처럼 육체만 날랐어요
누군가의 벽에서 손톱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면 그건 애니의 비명
애니는 사탄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 살아요 그 책에 떠도는 유령 목격담 속에 살아요 삼백 살 소녀 애니는 21세기에 드러난 메리 킹스 클로즈에 살아요
누군가의 목덜미에 오싹한 한기가 스쳤다면 그건 애니의 시선
애니는 지하 여행자들의 기념사진 속에 살아요 그들이 남기고 간 인형들 속에 살아요 애니가 애니 곁을 지나가요 애니가 애니를 돌아봐요 애니는 낯선 기억의 주인이 되어 살아요 아무도 헐지 못하는 시간 속에 애니의 방이 있어요
연이는 한국에 살아요 열여덟 살 연이는 사월의 땅끝 서해에 살아요 북악산 푸른 기와 아래 아주 먼 곳에 살아요 아주 낮은 곳에 살아요 지붕도 없는 물속에 살아요 천 일 동안 비를 맞고 있는 영혼들 속에 살아요 마르지 않는 물의 교복을 입고 있어요 소연이 시연이 호연이 채연이 수연이 출석을 부르면 물의 의자에서 일어나 물의 뼈로 걸어와요
누군가 텅 빈 입속으로 새 한 마리가 스몄다면 그건 연이가 흘린 물의 혀
입에서 입으로 연이는 네버엔딩 스토리 속에 살아요 그 노래가 흐르는 남녀노소 사이에 살아요 미연이의 병실에도 지연이의 알바천국에도 보연이의 요람 속에도 연이가 살아요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칠 때 그건 연이가 움켜쥔 물의 주먹
울음이 터지면 굴뚝처럼 눈물 줄기를 타고 연이가 들어와요 가슴벽을 이부자리 삼아 우린 맞대고 살아요 눈을 감으면 서로의 미래가 되어 우린 반반씩 살아요 내장을 꽂아 둔 화병이 있는 식탁 맨 끝자리에 연이가 살아요 아무도 열지 못하는 명치끝에 연이의 방이 있어요.
긴 시인데, 모두 옮겨 적었다. 차마 한 구절이라도 생략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그래, 슬퍼서 그랬다. 시 본문 아래 시인이 적어 둔 다음의 문장에 가서는 정말로 울음이 터져 버렸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 중 김소연, 김시연, 김호연, 박채연, 이수연의 이름을 빌림." 손이 떨려 그 무엇도 더는 적지 못하겠다.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