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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언니 같은/박인옥

시계아이콘01분 02초 소요


 언니는 용해 빠졌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날에도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씽크대가 서너 번 넘쳐 나는 우리 집 한 끼 설거지
 저녁 설거지를 못 한 이튿날 새벽
 언니는 일어나 그 많은 부엌일 다하고
 끓어 넘친 음식 딱지 얼룩덜룩했던 가스렌지도
 반짝거리도록 닦는다

 내가 앓느라 노란 얼굴로
 이른 저녁부터 깊이 잠들던 때
 언니는 따뜻한 물로 아이들 발을 닦아 주었나 보다
 어느 날 큰아들이 엄마 발 닦아 주는 체험을 마치고
 내가 뿌듯해하자
 아빠는 매일 우리들 발을 닦아 주셨어요
 네 명의 동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잘 다려진 교복 세 벌이 가지런히 걸려 있고
 다섯 뭉치의 아이들 옷이 높은 건물처럼 개켜져 있다
 막내가 입고 뒹구는 잠옷이 구김 없이 반들거리는 걸 보면
 또 언니가 어느새 다려 놓은 거다
 휴일 내내 언니는 다림질하느라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염이 자라 덥수룩하다
 베란다 끝에 서서 끝없는 집안일을 다 털어 낸 듯
 담배 한 대 피우는 당신
 좋은 언니 같은


[오후 한詩]언니 같은/박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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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시는 참 다정해서 읽는 일만으로도 흐뭇해질 때가 있다. 이 시가 그렇다. 금방 알아챘겠지만 이 시에 등장하는 "좋은 언니"는 남편이다. 설거지도 군말 없이 척척 하고, 아이들 발도 매일매일 닦아 주고, 교복도 잠옷도 잘 다리는 그런 남편 말이다. 그런 남편이라면 "베란다 끝에 서서" "담배 한 대 피"운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 또한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다. 이 시의 행간마다 적혀 있는 장면들은 너무너무 행복해 보여 실은 살짝 심통이 날 정도다. 그런데 더할 나위 없이 다감한 이 시를 읽으면서 새삼 배우는 점은 '낯설게 하기'의 미덕이다. '낯설게 하기'의 뜻은 축자적 의미 그대로인데, '낯설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대상을 낯설게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남편'을 '남편'의 맥락에서 떼어 놓고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인 듯 유심히 바라본 결과가 이 시의 첫 문장이고, 이 시를 이끌고 있는 핵심 기제인 셈이다. 시는 그러니까 어디 저 멀리에 있는 게 아니라 다만 그저 슬쩍 다르게 보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어느새 우리 곁에서 반짝이는 그런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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