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보복초지로 규제 본격화…공연·예능편성·CF·영화 등 줄줄이 무산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영 죽을 맛이에요. 손발이 묶여버렸죠." 베이징에서 8년 간 콘텐츠 업체를 운영한 A씨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올 봄부터 추진해온 한류 사업 여섯 개가 최근 모두 무산됐다. "8월부터 지지부진하더니 결국 불발되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이유로요. 한국과 관련한 어떤 사업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른바 '한한령(限韓令)' 여파다. 지난 7월 정부의 한반도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이 보복 조치의 일환으로 한류 규제를 본격화했다. 최근 문턱은 더 높아졌다. 중국 문화부에 따르면 지난 9월부터 중국 공연을 허가받은 한국 스타는 한 명도 없다. 망고TV '아빠 어디가' 시즌4에 출연 중인 황치열은 하차하기로 했고, 후난위성 4분기에 편성 예정됐던 김영희 PD의 '오라! 한다면 한다'는 광전총국에서 심의를 하지 않아 편성이 불발됐다. CCTV에서 방영했던 '무한도전'의 중국판 '대단한 도전'도 더 이상 방영하지 않는다. MBC와 찬싱제작이 장수위성에서 '우리들의 도전'이라는 새 명칭으로 12월 4일 첫 선을 보일 것을 예고했으나 이 역시 미뤄질 것으로 예측된다. 중국에서 한류 에이전트로 일하는 B씨는 "최근 중국 스마트폰 비보(vivo)의 모델이 송중기에서 펑위옌으로 교체됐다. 핸드폰의 높은 인기를 견인하고도 6개월 만에 하차한 것은 외압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불똥은 영화계에도 튀었다. 한국의 유명 감독이나 배우들이 합류한 작품의 상당수가 무산되거나 촬영이 미뤄지고 있다. 에이전트 C씨는 "올해만 네 작품이 불발됐다. 사드 배치가 결정되기 전까지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이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계약을 피한다. 이 제작비만 500억원에 이른다"고 했다. 그는 "한국과 연결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다. 한국인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익명으로 사겠다고 할 정도"라고 했다. CJ E&M과 중국 측 기업들이 공동으로 기획 중인 다섯 작품도 아직 촬영에 돌입하지 못했다.
베이징 소재 한국문화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영화진흥위원회 등은 22일 긴급회의를 갖고 대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현지 관계자들의 의견을 근거로 이번 사태를 사실상 한한령 여파로 규정했다. 중국의 광고 관계자는 "장수위성의 광고관계자로부터 한한령 관련 내용을 전달받았다. 앞으로 한국과 관련한 광고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중국의 한국콘텐츠 관계자는 "사드배치가 결정된 7월과 큰 차이는 없으나, 특히 광고에서 일련의 프로세스와 유사한 상황으로 규제가 실행되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했다.
한국문화원 등은 최근 중국 광전총국 아시아처장에게 관련 내용의 확인을 요청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다. A씨는 "사드 배치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어떤 묘수도 나올 수 없다.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내건 현 정부가 오히려 문화사업을 망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는 중국 정부에 어떤 것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조윤선 장관이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 등에 발목이 잡혀 있고, 해당 부서의 과장도 미르재단 의혹에 연루되면서 최근 산하기관으로 파견을 갔다. A씨는 "지금은 규제가 문화산업에 그치고 있지만 산업 전반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정부의 조속한 대응이 시급하다"고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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