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대외정책 전문가 "편향된 이데올로기 소유자보다 실용적 기업인과 협상이 낫다" 낙관
[아시아경제 이진수 기자] "중국이 대미(對美) 무역에서 득을 보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미국을 계속 '성폭행'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훔치고 있다."
미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의 유세 중 발언이다. 자국을 향해 이런 극단적 표현까지 일삼은 트럼프 당선인에 대해 안심하는 중국인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트럼프 당선인의 막말에도 중국의 대외정책 전문가 상당수는 '협상가(deal maker)'다운 그의 어법을 주목하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최근 보도했다.
베이징(北京) 소재 중국국제문제연구원의 롼쭝쩌(阮宗澤) 상무부원장은 "트럼프의 집권기 중 중미 관계가 크게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은 편향된 이데올로기의 소유자가 아니라 트럼프 같은 실용적 기업인과 협상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것을 기업인은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 국제문제연구원의 선딩리(沈丁立) 부원장은 트럼프 당선과 관련해 "중국의 분위기가 조금 들떠 있다"고 전했다.
미 대선 기간 중 중국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웨이보(微博)에는 '도널드 트럼프 슈퍼팬 클럽', '신제(神帝) 트럼프' 같은 이름의 소규모 온라인 단체가 형성돼 있었다.
당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미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 공허한 약속만 늘어놓지만 트럼프는 자기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왕"이라거나 "트럼프는 솔직하고 실용적인 인물"이라고 칭송하는 글도 있었다.
중국의 트럼프 팬들은 사회적 관용과 점잖은 태도를 집어 던진 듯한 그의 거침없는 언행에 환호했다. 이들은 중국의 인권 및 정치적 자유에 대해 들먹이는 클린턴과 달리 트럼프가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나마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다.
홍콩 봉황위성TV(鳳凰衛視)의 우쥔(吳軍) 정치평론가는 "트럼프가 중국에 가장 이로운 미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며 "미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실용주의적인데다 트럼프는 자기의 상업적 이익을 중시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뉴욕에 자리잡은 아시아소사이어티 미중관계센터의 오빌 셸 소장은 "트럼프 당선인에게 이렇다 할 대(對)중국 정책이 아직 없다"며 "중국 지도부는 그가 이론가 아닌 기회주의자임을 잘 알기에 모든 게 협상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중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불분명하다. 트럼프 당선인이 백악관으로 들어가면 입버릇처럼 말한대로 중국산 수입품에 45%의 관세를 매길까.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까. 미국과 아시아 동맹국들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행동을 자극하지 않을까. 중국이 이미 비준한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뒤흔들어놓지 않을까.
이는 트럼프 당선인이 어떤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하느냐, 의회가 트럼프를 어떻게 견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트럼프 당선인의 접근법은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다르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국방부 관리로 일한 트럼프 정권 인수팀의 마이클 필스버리 고문은 "트럼프 당선인이 전통 보수 공화당원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라며 "그는 중국의 국방력, 우주ㆍ남중국해 계획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일자리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민감한 '中 인권문제'엔 무관심
신고립주의, 양국 경제협력 지속에 유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공산당 반대 세력에게 재갈을 물려왔지만 트럼프는 중국의 인권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1990년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와 가진 회견에서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에 대해 언급하며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자 중국 정부가 이들을 거의 날려버렸다"면서 "중국이 악랄하고 끔찍하긴 했지만 힘으로 시위 진압에 나서는 완력을 보여줬다"고 발언했다.
정치문제를 대놓고 건드렸다 베이징외국어대학 강단에서 쫓겨난 차오무(喬木) 신문학 교수는 "중국이 전제국가든 아니든 트럼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베이징 소재 런민(人民)대학 정치학과의 장밍(張鳴) 교수도 "트럼프는 중국의 인권 문제에 그리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로 회귀(Pivot to Aisa)'를 부르짖었다. 중국 입장에서 미국의 아시아 중시정책은 중국을 더 견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비친다. 그러나 트럼프는 대선 유세 중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다시 말해 세계의 문제들로부터 손떼려는 '신(新)고립주의'를 택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 중시정책에 힘을 싣고자 추진해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관련해서도 트럼프는 콧방귀만 뀌었다. 일본ㆍ한국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과 맺은 방위조약도 손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오바마 정부는 급기야 TPP에 대한 의회 비준을 추진하지 않기로 11일(현지시간) 결정했다.
중국은 미국 주도의 TPP가 무산될 가능성이 커지자 대항마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강력히 추진할 계획이다.
아시아에서 손떼겠다는 트럼프의 발언들에 중국이 솔깃한 것은 물론이다. 시 주석은 지난 9일 트럼프 당선인에게 보낸 축하 전문에서 "두 나라가 서로 존중하며 협력ㆍ공동번영의 원칙 아래 지역별, 글로벌 각 영역의 협력도 넓혀 건설적인 방식으로 차이점을 다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가 '중미 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1일 정례 브리핑에서 "자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미 정치인이라면 양국의 경제ㆍ무역 협력으로 이어질 정책을 택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트럼프 당선인의 안보문제 수석 고문인 제임스 울시는 홍콩 영자 신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10일자 기고문에서 "트럼프 집권 기간 중 양국이 이데올로기 차이를 극복하고 '그랜드 바겐(일괄타결)'에 이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의 정치ㆍ사회 구조를 받아들이는 대신 중국은 아시아의 현상을 뒤흔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임기는 내년 가을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시작된다. 일부에서는 시 주석이 19차 당대회를 통해 집권 연장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시 주석은 오는 2022년 69세로 임기 만료를 맞게 된다.
이렇게 민감한 시점을 앞두고 무역문제에서 시 주석이 트럼프 당선인과 합의점에 이르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워싱턴 소재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중국 경제 전문가 데릭 시저스는 "미국이 관세를 올릴 경우 중국이 즉각 무역보복에 나서면 훨씬 많은 것을 잃는 쪽은 중국"이라면서도 "그러나 내년이 당대회가 열리는 해이니만큼 중국은 중화주의를 내세워 보복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도 미중 관계를 시험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초대 국무장관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9일 폭스뉴스와 가진 회견에서 "중국이 호전적으로 나올 경우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문제가 트럼프 임기 내내 미국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남중국해의 일부 섬을 사실상 군사 기지화했다. 게다가 지난달 방중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에게 240억달러(약 28조원) 상당의 경제 선물을 안겨줬다. 이달 초에는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를 초청해 정상회담 등 최고 예우에다 340억달러 규모의 투자협정까지 체결했다.
중국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으로 훼손된 양국 관계 회복 차원에서 지난 9월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를 초청하기도 했다.
런민대학의 장 교수는 "트럼프 당선인의 보수주의ㆍ신고립주의로 보건대 남중국해에 관한 한 미국의 개입이 줄어 중국 지도부가 골머리를 앓는 일은 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 외교부 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인 마전강(馬振崗) 전 주영 대사는 "양국의 전반적 관계가 공동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것"으로 내다봤다. 트럼프의 아무리 사소한 비합리적 생각이라도 미 행정부 안에서 제재 받아 균형을 이루게 되리라는 것이다.
중국 경제 전문 매체 차이신(財新)의 선밍가오(沈明高) 애널리스트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트럼프의 미 대선 승리야말로 '탈세계화(de-globalization)' 흐름의 극명한 본보기"라며 "그만큼 중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푸단대학 국제문제연구원의 선 부원장은 "트럼프 당선인이 반대하는 것은 TPP이지 글로벌화가 아니다"라며 "일례로 그가 글로벌화의 상징인 세계무역기구(WTO)에 반대한 적은 없다"고 상기시켰다.
선 부원장은 "지금의 떠오르는 중국과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8년 전의 중국은 확연히 다르다"며 "요즘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뭔가 강요할 수 있는 실탄이 별로 없다"고 진단했다.
이진수 기자 commu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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