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스토리 - T.S 엘리엇의 탄생일에 생각해보는 '사는 일의 피곤함'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1888년 오늘(9월26일)은 시인 T.S 엘리엇이 탄생한 날이다. 20세기 인류를 강타했던 시 '황무지(The Waste Land)'(1922)의 충격은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죽고싶다'는 인용 제사(題詞)로 시작해서, "평화,평화,평화"로 끝난다. 황무지는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시절의 거대한 스트레스를 드러낸다. 그에게 4월은 무엇이었을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많은 시인들이 그토록 예찬했던 그 봄날의 절정은, 그에게는 진저리를 칠 만큼 다시 살아내야 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냥 죽어 있으면 좋겠는데 왜 다시 살아나야 한단 말인가. 죽음의 평화를 왜 조물주는 빼앗는가. 이 봄날의 '생기'라는 저주를 통해서?
시의 첫부분에 나오는 '쿠마에의 무당 여인' 스토리는, 엘리어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강렬하게 웅변한다.
"그런데 쿠마의 시빌이 새장 속에 매달려 있는 걸 난 정말 내 눈으로 보았어. 그녀에게 애들이 '시빌, 뭘 하고 싶니?'하고 조롱했지. 그녀는 '난 죽고 싶어'하고 대답했어."
쿠마에 무녀(Cumaean Sibyl)는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의 쿠마에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고 한다. 이 무녀는 구세주의 등장을 예언할만큼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아폴론 신은 그녀를 몹시 사랑했기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그녀는 신에게 한 줌의 모래를 들고 와서, 이 모래의 숫자만큼 생일을 갖게 해달라고 말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다.무녀는 오랜 생명만을 요구했지 젊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죽지 않았고 계속 육체의 크기만 줄어들었다. 마침내 목소리만 남았다고 한다. 영원의 축복은 그녀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저주가 되었다.
시빌은 예언자 혹은 무녀의 대명사가 된다. 영생을 꿈꾸는 인간에게 그녀는 통렬한 풍자의 주인공이 되어왔다. 미켈란젤로는 1510년 이 여인을 그렸는데, 아주 억센 근육질의 늙은 여자로 묘사했다. 그 허망한 저주의 세월을 견디며 그녀는 아이들의 조롱 속에서 책을 펼쳐서 보고 있다. 그 책 속엔 뭐가 들어있을까. 오직 '시간'만이 줄 수 있는 지혜가 거기 들어있을 것이다. 세월은 그녀가 꿈꾸었던 '영원한 삶'의 실체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게 했지만, 육체가 아닌 영적인 영원을 찾는 심안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 위대한 화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젊고 예쁜 시빌은, 1610년경에 그려진 피나코테카 카피톨리나의 작품이다. 이 여인을 보고 있노라면, '젊음'이 인간의 몸에 머물러 있는 시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엘리엇이 4월을 잔인하다고 했던 것은, 죽은 나무를 깨우기 때문이다. 그냥 죽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저주라고 생각했다. 조물주는 평화로운 세상을 기획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분발하고 투쟁해야만 하는 자율적 전쟁시스템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이 예민한 시인은 그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엘리엇은 16세 때 하버드대에 입학해서 3년만에 졸업했고 프랑스 소르본느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던 수재였다. 그러나 이후 런던의 은행에 취업해 금융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를 발견해낸 사람은 시인 에즈라 파운드였다. 그는 이 청년시인이 잡지에 '황무지'를 발표하도록 도와준다. (엘리엇에겐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지만, 파운드는 파시즘을 옹호한 과오를 남긴 시인이다.) 시 '황무지'에 쿠마에 무녀 얘기를 쓴 뒤 엘리엇은 이 후원자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보다 정교한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를 위하여.'
엘리엇을 깨운 에즈라 파운드는, 4월에 온갖 초목들을 깨운 조물주와 같은 존재였을까. 차라리 죽음은 고요해서 평화로웠는데, '시'의 꿈틀거리는 생기는 그를 오히려 힘겹게 했을까. 그런 기분을 슬쩍 돋워, 이 위대한 시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킨 것일까. 쿠마에의 무녀는 바로 자신이었고, "딱 한 가지만 갖고 싶다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 장난끼 가득한 아이는, 파운드였을까. 징그럽고 피곤한 삶이지만, 그래도 죽음을 떨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 영생의 욕망과 죽음의 저주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도는, 우주적 생태계의 본질을 읽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유머야 말로 심각한 이야기를 말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과연 그렇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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