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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ㅎ'자도 모르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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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ㅎ'자도 모르는 대한민국 이정일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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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협상 전문가인 허브 코헨이 펴낸 '협상의 법칙'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거대한 협상 테이블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다.'


그가 언급한 '좋든 싫든'의 필연성과 '거대한'의 불가피성은 우리의 삶이 크고 작은 협상으로 이뤄졌음을 역설한다. 예컨대 가족의 외식 메뉴를 고르거나(대개는 아내가 결정하지만), 회사에서 MT 장소를 정하거나(대부분 부서장 뜻대로 되지만), 노사가 연봉을 밀당하거나(십중팔구 사측의 목표에 부합하지만)….

그런데 협상 결과가 누군가의 생사를 가른다면? 사느냐, 죽느냐가 그저 몇 번의 협상으로 결판난다면? 생경한 질문이 아니다. 지금 우리 해운 업계의 처지가 그렇다. 외국 선주에게 배를 빌려 운항한 뒤 임대료를 지불하는 '용선료'가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목줄을 죄고 있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이 "(선주들과 협상해) 용선료를 인하하지 못하면 법정관리로 보내겠다"고 윽박지르면서 시작된 협상 드라마는 어느새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결과는 50대50, 예측불허이지만 그간의 협상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상의 법칙을 잘 지켰을까.


법칙1 시간. 협상은 급한 쪽이 지게 마련이다. 시간이 없으면 서두르고 무리수를 둔다. 그런 점에서 금융당국과 채권단이 '데드라인' 패를 깐 것은 실수였다. 그 데드라인(5월20일)을 이틀 앞두고 해외 선주들이 방한해서 채권단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다급했던 채권단은 '법정관리'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선주들은 급할 게 없었다. 협상이 소득 없이 끝나자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한발 물러섰다. "물리적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협상을 진행하겠다." 데드라인은 내부 일정일 뿐, 그것이 외부로 공개되는 순간 약점이 된다. 코헨은 말한다. "최선의 전략은 '마감 시간'을 상대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마감 시간은 협상의 산물이므로 유연하고 탄력적이어야 한다."

법칙2 정보.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면서 내 전략을 숨기는 것은 최선의 수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데 실패하더라도 내 전략을 들키지 않는다면 차선쯤 된다. 하지만 읽지도 못하고 들키기만 한다면? 최악의 수다. 이번 협상은 시작부터 그랬다. 용선료 인하 목표가 30%라는 얘기가 슬금슬금 흘러나오더니 "OO선주가 협상에 부정적이다" "용선료 인하 목표가 몇 %로 확정됐다"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을 합병할 것이다"는 별의별 소문이 눈덩이처럼 달라붙었다. 상황은 짐작이 된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고 언론은 기삿거리가 아쉬웠다. 그렇게 우리가 루머와 소문과 '카더라'를 자전거래하는 사이 협상 전략은 고스란히 상대에게 노출됐다. 코헨의 조언이다. "좋은 말을 사려면 다른 말에 관심을 보여라."


법칙3 미끼. 채권단이 선주들에게 꺼낸 카드는 '빨리 결정해라. 그렇지 않으면 법정관리에 들어가겠다'는 최후통첩이 전부였다. 그렇게 엄포를 놓으면 상대가 물러설 줄 알았다. 단숨에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넉넉하고 정보가 많은 상대에게는 채찍보다 당근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채권단 중 누구라도 먼저 도장을 찍을 수 있도록 미끼를 던졌어야 했다. 남들보다 앞서 협상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상대를 설득시켜야 했다. 코헨은 충고한다. "내가 상대보다 약할 때는 미끼를 던져라."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법칙 1, 2, 3을 제대로 지켰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이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서두르면서 먼저 패를 까는 바람에 협상은 길어졌고 진통은 컸다. 예상보다 많은 것을 잃었다. 어차피 현대상선에 이어 한진해운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용선료가 아니라도, 우리는 앞으로 또 다른 협상 테이블에서 수많은 상대를 만나야 한다. 그때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것인가. 협상의 'ㅎ'자도 모른 채 헛발질만 할 것인가. 구조조정의 결과 만큼이나 협상 과정이 중요한 이유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모두는 '좋든 싫든' '거대한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다.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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