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길술'클럽 <Alcohol on the Road>… 막위맥와 4색 취향, 한국의 술문화 코드 읽기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한 해 빨리, 6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술로 자주 빠졌다.”
아무리 인심 써서 생각해도 6 앞에 1이 빠져있는 게 아니냐 되묻게 되지만, 저 놀라운 자기 고백을 쏟아냈던 당대의 주신(酒神) 시인 변영로 선생의 털털한 자기 고백 앞에선 요즘 사람 기준으로도 깜짝 놀라기 마련. 이에 버금가는 에피소드들과 함께 학창시절 막걸리를 말로 받아다 마시던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와서 요리 좀 해라” 난데없이 무보수 출장요리사로 불려 나간 난지 캠핑장엔 비장한 표정의 네 남녀가 탁자에 둘러앉아 각자 가져온 아이스박스에서 주섬주섬 술을 꺼내고 있었다. 이들은 2주에 한 번 모여 노상에서 각자 술 마시고 헤어지는 모임을 1년째 계속해온 ‘Alcohol on the Road’ 멤버들로, 더 더워지기 전에 쾌청한 기분을 내고 싶어 캠핑장에서 모였다고 설명했다. 외모와 성격만큼이나 확연히 다른 이들의 4가지 취향을 통해 각양각색의 음주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막걸리를 사랑하는 소녀 감성
풋풋한 외모의 은지(가명) 씨는 3년 차 직장인으로 게임회사 해외서비스팀에 근무 중이라고 했다. 계절에 한 번 배편으로 일본에 놀러 가 호로요이(일본의 인기 과일향 주류, 알콜 3% 내외의 저도주)를 캐리어에 한가득 담아 구매해올 만큼 주류 사랑이 대단했던 그녀는 최근 특산물 막걸리에 푹 빠졌는데, 오늘 모임에는 공주 알밤 막걸리와 가평 잣 막걸리를 들고 왔단다. 지역특산물을 이용한 막걸리 대부분이 도수가 5~8도 내외인데다 곡물주인 탓에 안주가 따로 필요 없이 배가 불러 좋다고 한 은지 씨는 가끔 막걸리 생각이 나는데 집 앞 편의점에 생 막걸리만 있는 경우 과일 요거트 음료를 함께 구입, 믹서기에 얼음과 막걸리, 요거트를 함께 넣고 갈아 마시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색다른 맛이 난다는 팁도 함께 일러주었다.
군인 동생의 의리 위스키
은지씨 이야기를 마뜩잖게 듣고 있던 민조(가명) 씨는 아이스박스에서 돌 얼음을 꺼내 잔에 담고 있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인쇄기획사에서 기획 일 시작한 지 5년째라는 그는 사무실보다 회사 공장에서 결과물을 총괄하는 일이 더 편하다고 자신 직업을 소개했다. 이번 4월 총선 땐 담당하고 있는 후보 포스터에 인쇄문제가 생겨 황급히 제출마감시간을 맞추느라 진땀을 쏟았다는 그는 갈수록 독한 술이 좋아지는데, 마침 부사관으로 복무 중인 동생이 한 달에 한 번 집에 올라오면서 면세 위스키인 임페리얼 17년을 사다 주는 통에 이 길(?)에 들었다고. 다음 모임 땐 외국에 다녀오는 인편을 통해 싱글몰트를 마셔보려 한다며 잔에 가득 담긴 위스키를 커피처럼 들이켰다.
벨기에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
스쳐 지나가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단정한 양복 차림의 승원(가명) 씨는 비스포크(맞춤정장) 샵을 운영하는 젊은 테일러다. 포마드로 정돈한 머리끝부터 블랙 스트레이트 팁으로 떨어지는 구두 끝까지 각 잡힌 스타일로 캠핑장에 도착한 그는 가방에서 각각 다른 잔 두 개와 맥주인지 와인인지 구분이 안 가는 코르크 병 1개와 작은 병 1개를 꺼냈는데, 전용 잔에 마셔야 하는 찐-한 맥주라고 소개했다. 코르크 병은 벨기에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만드는 트라피스트 맥주 중 하나인 시메이로, 전 세계에 8개의 수도원에서 맥주 양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유럽 유학 시절 처음 접한 수도원 맥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는 그는, 이내 작은 병을 따고 최근에 몰두하고 있는 ‘사우어 에일’ 맥주, 뀌베 데 자코뱅을 소개한다. 진한 갈색에 달콤한 바닐라 향이 올라오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이런 맥주에 안주는 사치라며 금방이라도 잔 속에 뛰어들 표정을 하는 그에게 이런 맥주는 어딜 가야 살 수 있냐 물으니 경리단의 우리슈퍼, 청담동 바텀즈업, 노원의 이편한마트, 양재동 비어랩, 천호동 유미마트 등에 가면 있다고 답했다.
와인을 물처럼 꿀꺽
막걸리를 물처럼 마시던 선배는 이제 와인을 물처럼 마시는 주당으로 변모해있었다. 광고감독으로 활약 중인 진홍(가명) 씨는 덩치에 걸맞게 큰 아이스박스를 내려놓는다. 탁자 위에 화려한 프린트의 돗자리를 까는데, 어디서 났냐 물으니 4병사면 준대서 8병 샀다며 아이스박스에서 고깃 덩어리와 식재료 등을 꺼내 필자에게 건네며 요리를 시작하라고 다그치고는 레드와인을 거침없이 열어 병째 들고 마신다. 미국 시절이 생각나 병을 종이로 감싸야 할 것 같다고 호들갑 떤 그는 마시던 와인은 베어플래그라는 미국산 블렌딩 와인이고, 순전히 외관과 사은품 때문에 사 왔는데 물처럼 목 넘김이 좋다며 금세 한 병을 다 비운다. 평소에도 와인을 이렇게 마시냐 물으니, 와인에도 T.P.O가 있다고 답한 진홍 씨는 아무래도 술은 편하고 기분 좋게 마실 때 가장 좋고, 가성비 괜찮은 와인을 부담 없이 야외에서 마시는 순간이 행복하다며 연신 고기와 와인을 번갈아 집어삼켰다.
술은 즐길 수 있는 만큼만
국내 음주 관련 법률은 길 위에서 술 마시는 행위를 직접적으로 규제하진 않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기본적으로 옥외에서의 음주가 불가하다. 일례로 미국 오하이오주의 음주 규정에 따르면 ‘야외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술을 마시면서 걸어가면 안 된다’, ‘술집에서 양주를 병째로 팔아서는 안 된다’ 등 야외음주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 항목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에 따라 지난 3월 2일 자로 ‘주류제조 시 판매용 용기에 과다한 음주는 건강에 해롭다는 내용과 임신 중 음주는 태아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내용의 경고 문구를 표기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야외 음주 자체에 대한 직접적 규정 없이 제조단계에서만 음주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
명정(酩酊)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취한 상태를 이르는 말로, 6살에 술에 취해 학교를 자주 빠졌다던 변영로 선생의 수필집 제목이 ‘명정 40년’이었다. 그는 일생을 술과 함께 취생몽사 하고자 했으나, 말년엔 식도암에 걸려 그 좋아하던 술을 멀리한 채 술친구들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날 알콜 온 더 로드 멤버들은 각자 가져온 술을 취향 껏 적당히 나눠 마신 후, 해 질 무렵 자리를 정리하고 콜택시를 불러 각자 유유히 사라졌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벗 삼기 위해 마시는 술을 위해 오늘의 취기를 아껴두는 그들의 모습에서 술을 친구 삼는 요즘 ‘술꾼’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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