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갑자기 웬 신영복이요?" 들고다니는 책('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본,한 동료의 말이었습니다. "그냥...읽지않고 지나쳐온 책이라서." "그래요? 요즘 살이가 꼭 감옥처럼 느껴져서가 아니구요?" "그런 이유도 없지 않죠 머."
우리가 대화하고 있을 때 마침 그 자리를 지나치던 당시 중앙일보 문화부의 이헌익 기자(지금은 작고)가 얘기에 끼어들었습니다. "오오, 이선생(저를 말합니다)이 신영복을 읽으신다?" 그 선배는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습니다. "실은 말이야.햇빛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을 언론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나였지. 딴 신문들은 주저주저했거든. 어느 날 우리 부서로 배달된 이 책을 나는 건성으로 읽어보려 했지. 그런데 한장 한장 읽어가다보니, 글 속에 담긴 명징한 생각들과 놀라운 통찰들이 장난이 아니더군."
그런데 아까 내게 처음 말 걸었던 동료와, 문화부 이기자는 마치 약속이나 한듯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 속에서 가장 잊지못할 귀절은 바로 이거야."
그들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죠. 1985년 8월28일 대전감옥에서 그의 계수씨에게 쓴 편지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합니다만,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왜냐하면 여름징역의 열 가지,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 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우기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온다 하던 비
한 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炎)도 더는 버티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朝夕)의 추량(秋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75년에서 88년까지 14년 동안 옥살이 틈틈이 계수씨와 형수씨 그리고 부모님께 쓴 편지들을 모아 출간한 이 책은, 한 지성의 치열한 내성(內省)과, 세상에 대한 눈부신 시선들을 알알이 드러내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수없이 책읽기를 멈추고 가슴에 돋는 감동과 나의 일상 속 무사(無思)의 삶들에 대한 뉘우침들로 오래 멍하니 있곤 하였습니다.
샤프연필로 그런 감동의 글귀마다 줄을 쳐두고 덮어둔 책을 열어 다시 음미하기도 하였습니다.그의 글이 이렇듯 순일한 기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옥살이 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자기관리의 끈과,사유의 균형감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편지글은 그저 단순한 소회를 끄적거리거나 안부나 전하는 글쓰기로 생각하는데 대해, 이 감옥 속의 필자는 달리 글을 쓸 방법이 없었기도 하겠지만, 진짜 하나의 문학으로 편지글을 오똑 세워놓았습니다. 10여년에 걸친 세월의, 생각의 궤적이 알알이 구슬처럼 꿰어져 빛납니다.그 하나하나 긴장하고 꼼꼼히 들여다봐야 하는, 웅숭깊은 사색들입니다.
하지만 나의 오래된 버릇대로,감명깊어서 줄쳤던 부분들을 인용함으로써,이 감동적인 책읽기를 온축(蘊蓄)하고 싶습니다.
<1982년 4월 9일 대전에서 계수씨께.>
"아! 나비다."
창가에 서있던 친구의 놀라움에 찬 발견에
얼른 일손 놓고 달려갔습니다.
반짝반짝 희디흰 한 송이 꽃이 되어
새 나비 한 마리가 춘삼월 훈풍 속을 날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연약한 나비가
봄하늘에 날아오르기까지 겪었을
그 긴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겨우내 잠자던 나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습니다.
작은 알이었던 시절부터
한 점의 공간을 우주로 삼고
소중히 생명을 간직해왔던
고독과 적막의 밤을 견디고...,
징그러운 번데기의 옷을 입고도
한시도 자신의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각고의 시절을 이기고...,
이제 꽃잎처럼 나래를 열어 찬란히 솟아오른 나비는,
그것이 비록 연약한 한 마리의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할 지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람한 승리의 화신으로
다가옵니다.
담 넘어 날아든 무심한 나비 한 마리가
펼쳐보인 봄의 뜻은,
이 곳에는 꽃나무가 없어
봄조차 가난하다던 푸념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뉘우치게 합니다.
<1982년 6월 8일 대전에서 계수씨께>
교도소에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욕설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는 실로 흐드러진 욕설의 잔치 속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저도 징역 초기에는
욕설을 듣는 방법이 너무 고지식하여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곧이곧대로 상상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궁상(窮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일쑤이었습니다만
지금은 그 방면에서도 어느 덧 이력이 나서
한 알의 당의정을 삼키듯
이순(耳順)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
저는 ....... 대상에 대한 사실적 인식을
기초로 하면서 예리한 풍자와
골계의 구조를 갖는 욕설에서,
인텔리의 추상적 언어유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적나라한 리얼리즘을 발견합니다.
뿐만 아니라 욕설에 동원되는
화재(話材)와 비유로부터
시세(時世)와 인정,풍물에 대한
뜸든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버섯이 아무리 곱다 한들
화분에 떠서 기리지 않듯이
욕설이 그 속에 아무리 뛰어난 예능을 담고 있다 한들
그것은 기실 응달의 산물이며
불행의 언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82년 8월11일 대전에서 계수씨께>
지난 번에는 교도소의 '우김질'에 대해
이야기를 썼읍니다만,
그 우김질도 찬찬히 관찰해보면
자기 주장을 우기는 방법도 각인각색인데,
대개 다음의 대여섯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무작정 큰소리 하나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방법입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고함때문에
다른 사람의 반론이 묻혀버리는,
이른바 "입만 있고 귀는 없는" 우격다짐입니다.
둘째는,그 주장에 날카로운 신경질이
가득 담겨있어서 자칫 싸움이 될까봐
말상대를 꺼리기 때문에
제대로의 시비나 쟁점에의 접근이 기피됨으로써
일단 부전승의 외형을 띠는 경우입니다.
세째는,최고급의 형용사,푸짐한 양사(詞),
과장과 다변으로
자기 주장의 거죽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감히 물량시대와 상업광고의
아류라 할 만합니다.
네째는,누구누구가 그렇게 말했다는둥,
무슨 책에 그렇게 씌어있다는둥,
자체의 조리나 논리적 귀결로써
자기 주장을 입증하려하지 아니하고,
유명인,특히 외국의 것에 편승,기술제휴(?)함으로써
"촌놈 겁주려는"매판적 방법입니다.
다섯째는,a1+a2+a3+...an등으로,
자기 중에 +가 되는 요인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알파"의 방법입니다.
결국 마이너스 요인에 대한
플러스 요인의 우세로써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법인데,
이는 소위 헤겔의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필연성의 일종이긴 하나
필연성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자연과학에 흔히 나타나는 기계적 사고의
전형입니다.
여섯째는,(자기의 주장을 편의상 "그것"이라고 한다면)
우선 "그것"과의 반대물을 대비하고,
전체 속에서의 "그것"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그것의 객관적 의의를 규정하며,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시(時)계열상의 변화 및 발전의 형태를 제시하는
등의 방법인데 이것은 한 마디로
다른 것들과의 관계와 상호 연관 속에서
"그것"을 동태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여섯 번째의 방법이
가장 지성적인 것은 물론입니다.
....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있게 기다려 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
<1983년 2월 7일 대전에서 계수씨께>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든다면
아마 '책가방끈이 길고 먹물이 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자는 대체로 벽돌을 쌓듯
정제되고 계산된 언어와 논리를 구사하되
필요 이상의 복잡한 표현과
미시적 사고로 말미암아
자기가 쳐놓은 의미망에 갇혀
헤어나지 못합니다.
도깨비이기는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파란색 도깨비와 노란색 도깨비를
구별하느라 수고롭습니다.
이에 비하여 후자의 그것은 구체적이고
그릇이 커서 손으로 만지듯
확실하고 시원시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단순화와 무리,
그리고 감정의 범람이 심하여
수염과 눈썹을 구별치 않고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단색적 사고를 면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십수 년의 징역을 살아오는 동안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경향의
틈새에서
여러 형태의 방황과 시행착오를 경험해 왔음이
사실입니다.
복잡한 표현과 관념적 사고를 내심 즐기며,
그것이 상위의 것이라 여기던
오만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조야한 비어를 배우고 주워섬김으로써
마치 군중관점을 얻은 듯,
자신의 관념성을 개조한 듯
착각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쪽을 절충하여
"중간은 정당하다"는 논리 속에 한동안 안주하다가
중간은 "가공의 자리"이며,방관이며,기회주의이며,
다른 형태의 방황임을 소스라쳐 깨닫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나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1984년 12월 28일 계수씨께>
낡은 것으로부터의 결별이
새로움의 한 조건이고 보면
칼날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겨울의 한 복판에
정월 초하루가 자리잡고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1988년 1월 30일 계수씨께>
작년 여름 비로 다 내렸기 때문인지
눈이 인색한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눈 뒤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 번 찐하게 안오나 젊은 친구들
기다려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에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싶다."
있으면서도 걷지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1984년 7월 14일 대전에서 형수님께>
"꽃순이"는 밤이면 쥐들의 놀이터가 되는
악대실습장을 지키기 위하여
악대부원들이 겨우겨우 구해온
고양이의 이름입니다.
지금은 가출(?)해버린지 1년도 더 넘어서
몰라볼 만큼 의젓한 한 마리의
"도둑고양이"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꽃순이라는 이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솔방울만한 불알을 과시하며
"쥐와 고양이의 대결"로 점철된
교도소의 밤을 늠름하게
걷는 모습을 먼빛으로 가끔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처음 고양이를 데려왔을 때는
꽃순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귀여운 새끼고양이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의한 부양과
사람들의 무분별한 애완은 금방 고양이를 무력하게 만들고
고양이로서의 자각을 더디게 하여
아무리 기다려도
쥐들을 자신의 먹이나 적으로 삼을 생각을
않았습니다.
쥐들로부터 찬장과 빨래,책등을 지키게 하려던
애초의 의도가 무산되자
이제는 사람들의 경멸과 학대가
영문모르는
새끼고양이를 들볶기 시작하였습니다.
높은 데서 떨어뜨려지기도 하고,
발길에 채이기도 하고,
연탄불 집게에
수염이 타기도 하고,
안티플라민이 코에 발리기도 하는 등
강훈(强訓)이란 이름의
장난과 천대 속에
눈만 사납게 빛내다가
드디어 어느날 밤 비닐창문을 뚫고
최초의 가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고양이에게
가출은 또 다른 고생과 위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우선 강아지만한 양재 공장의
검은 고양이가
자기의 영지에 침입한 이 새끼고양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밤중에 꽃순이의 자지러지는
비명을 듣기도 하고,
다리를 절며 후미진 곳으로 도는
처량한 모습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꽃순이는
몇 차례 제 발로 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구네트로 수렵을 당하여
묶여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뜻깊은 사실은,
이처럼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는 동안
이제는 사랑도 미움도 시들해져버린
악대부원들의 관심 밖으로
서서히,그리고 완전히 걸어나와
"고양이의 길"을 걸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는 꽃순이가
양재공장의 검은 고양이와
격렬한 한판 승부에서
비기는
현장을 목격하고
꽃순이의 변모와 성장을 대견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밤중에 고양이 소리가 나면
우리 방의 악대부원 서너 명은
얼른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고양이를 향해
"꽃순아!"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아는 체를 합니다.
그러나 꽃순이는 사람들의 기척에
잠시 경계의 몸짓을 해보일 뿐
이쪽의 미련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꽃순이"라는 옛날의 이름으로
부르는 쪽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꽃순이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만
생각 끝에 덧붙여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며칠 전 악대원 몇 사람과
함께 지도원 휴게실에 들렀다가
거기서 우유며 통조림을 얻어먹고 있는
꽃순이를 본 사실입니다.
언제부터 이 먹을 것이 많은
지도원을 드나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의 꽃순이는 먼빛으로 보며 대견해했던
"밤의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가발공장에 다니던 영자를 중동(中洞) 창녀촌에서
보았을 때의 심정"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꽃순이의 실패"도
"중동의 영자"나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실패나 마찬가지로
그가 겪었을 모진 시련과 편력을
알지 못하는 남들로서는
함부로
단언할 수 없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
이렇게 인용하다간 한이 없겠습니다. 다산의 생애를 담은 전기를 읽고나서 차분히 소회를 적은 83년의 글도 내겐 큰 즐거움이었습니다.신영복님은 다산의 유배생활을 오히려 부러워하고 있는데,그것은 요즘옥살이보다 조선 유배가 더 팔자늘어진
삶이어서가 아니라,그런 영어의 삶의 통해서 다산이 유지했던 삶의 꼿꼿함과 사유의 팽팽함에 스스로 못따라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년에 걸친 유형의 세월을 빛나는 창조의 공간으로 삼은 "비약"이 부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부러움에도 불구하고, 신영복님의 삶 역시 다산 못지않게 늘 새로워지는 삶을 사셨고 궁핍과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힘 있는 삶의 한 모델을 보여주셨다 할 만 합니다.
이런 책은 곁에 두고 두고두고 읽어야 할 텐데 게으름과 무심함이 이 사색의 장들을 다시 넘기는 기회를 미뤄왔습니다. 어젯밤 신영복선생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의 암투병이 있었지만, 고결하게 생을 살아낸 큰 사람을 보내는 마음의 허기는 줄이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혼란스럽고 탐욕들이 들끓는 세한의 시절인지라, 선생의 빈 자리에 드는 한기가 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요히 명복을 빕니다.
* 다음은 신영복선생 별세 관련 뉴스.
15일 성공회대와 출판업계에 따르면 신영복 교수가 향년 75세 나이로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별세했다. 신 교수는 2014년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으며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숨졌다. 이날 오후 9시 30분께 자택에서 호흡이 멈췄고 인근 이대목동병원으로 옮겨져 11시 47분 최종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신 교수는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일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년 20일을 복역하다가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정치경제학, 사회과학입문, 중국고전강독을 강의한 그는 1998년 사면복권됐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뒤 특별석방되기까지 20년간 수감생활을 하며 느낀 한과 고뇌를 230여장의 편지와 글로 풀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외에도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1·2’,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 ‘처음처럼’, ‘변방을 찾아서’ 등의 책을 냈다.
빈소는 16일 오후 2시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차려진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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