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경제위기론'이 오르내리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위기의 도래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 그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러다간 위기가 오는 게 아닌가'라는 막연한 불안감 정도이던 것이 '위기가 올 확률이 높다'는 유력설을 넘어 이제는 '위기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론으로까지 발전해 있다. 여기에 위기가 닥친다면 그 시점은 2017년이 될 것이라는 예고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2017년 위기설'. 대규모 감원 한파 속에 맞고 있는 2015년 세밑에 드리운 종말론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실제 이상의 두려움을 갖지만 않는다면 한편으로 이를 위기에 대한 경고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경고를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위기가 올 것이냐는 것보다는 위기가 왔을 때 과연 우리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기 그 자체가 아니라 위기라는 도전에 대한 응전력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예측대로 만약 2017년에 위기가 온다면 그건 20년 만의 위기 재연이 된다. 그 위기가 지난 1997년처럼 외환위기가 될 것인지 다른 양상일지는 미지수다. 어떤 위기든 간에 우리는 20년 전처럼 위기에서 헤쳐나올 수 있을까.
20년 전의 외환위기는 국치(國恥)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위기를 극복한 승리의 경험이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지 3년 만인 2000년 12월4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선언했다. 그리고 다음 해 8월에는 IMF 관리체제를 공식 '졸업'했다. 사상 유례 없는 조기 위기극복이었다. 그 때 그걸 가능케 했던 건 무엇이었던가. 혹독한 구조조정, 긴축정책이 큰 요인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혼연일체의 '구국(救國)' 열기가 있었던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건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금을 팔아 외화를 벌자는 호소에 온 국민이 나섰고, 아기 돌 반지와 결혼 예물, 십자가 목걸이까지 모였다. 지난 8월 어느 공중파 방송사가 '광복 70주년간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을 조사한 결과 금모으기 운동이 3위에 뽑힌 이유가 당시 모은 금의 외화유치 효과가 22억달러였다는 그 수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장롱 속의 금붙이를 들고 나온 서민들의 행렬이 보여준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 디폴트 위기를 맞았던 그리스에서 롤 모델로 거론될 만큼 국제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 그런데 한국이 또 다시 경제위기를 맞게 된다면 우리는 이번에도 과연 금모으기 운동을 또 보여줄 수 있을까. 금모으기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도 그때처럼 '범국민적' 총화단결을 보여줄 수 있을까.
'헬조선' '망한 민국'이니 하는 말들, 과거에 듣지 못했던 말들이 일상어로 굳어져 있는 현실은 그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하게 한다. '우리'를 잃어버린 '우리나라', 적잖은 국민들이 스스로 그 소속이기를 거부하고 싶은 국가, 남북 간의 분단을 넘어선 또 다른 분단선이 도처에 그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20년 전과 같은 '거국적' 구국의지가 재연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위기는 바로 그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위기는 미래의 불안이 아니라 이미 현재다. 최소한 그 일부는 이미 현재에 와 있다.
결코 비관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낙관론을 위한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그늘과 우울한 초상을 마주할 때라야 진짜 위기 극복의 힘이 마련될 것이다. 한국 경제가 쌓아온 든든한 자산, 국제사회가 평가하듯 만만치 않은 한국경제의 저력이라는 빛으로 그늘을 비출 때 빛은 더욱 커지고 넓어질 것이다. 그렇게 넓어진 빛이 금모으기와 같은 역동적인 힘을 되살려줄 것이다. 내년이 그런 힘을 다시 모으는 해가 된다면 2016년은 위기로 가는 해가 아니라 위기를 막는 해가 될 것이다. 위기를 이겨낼 힘을 기르는 해가 될 것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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