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충무로에서]'비둘기의 발'을 그리는 사람들

시계아이콘01분 55초 소요

[충무로에서]'비둘기의 발'을 그리는 사람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AD

미국 수도 워싱턴 D.C.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대부분 공짜여서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보스턴으로 이어지는 미국 동부 도시 여행을 워싱턴 D.C.에서 시작하면 손해 보는 느낌을 저절로 갖게 된다. 다른 데에는 공공 전시기관이 공짜인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워싱턴에는 사립 전시공간도 상당히 많은데 그중에서 최근에 가본 곳은 미국 최초의 근현대미술 미술관이라고 하는 필립스컬렉션이다.


근현대미술이라고 하니 피카소 그림이 빠질 리가 없는데 예전부터 미술관에서 피카소 그림을 마주칠 때마다 늘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면 엄청 노력과 수고가 들 텐데, 이렇게 개념적으로 그리면 왠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번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오늘도 미대 입시를 치르는 우리 딸은 거의 하루 열 시간 오른쪽 어깨가 빠지고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피카소처럼 그려도 된다면 그런 헛수고가 따로 없겠다.

나 같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당연히 예견해서인지 피카소는 자기가 사실적인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아니고 안 그리는 것이라는 취지로 응수한 바 있다. 이미 자신이 열다섯 살 때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증거를 찾기 위해서 미술관의 근현대 섹션을 가게 되면 피카소가 어렸을 적 그린 그림들을 무척이나 열심히 찾아보았다. 근데 아쉽게도 피카소의 어렸을 적 그림들은 못 그린 것은 아니지만 내 눈에는 사실의 재현이라는 면에서는 라파엘로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필립스컬렉션에서 본 피카소 초기작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작품 아래 설명을 읽다 보니 이런 일화가 나왔다. 피카소의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매일 비둘기의 발을 그리게 했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추상화는 그렇게 한 사물을 끈질기게 보다가 태어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무척 컸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바르셀로나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는데, 말을 하기도 전에 그림을 그렸다는 피카소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피카소에게 전통적인 사실 재현 위주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피카소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에 열세 살에 최연소로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이 입학시험은 보통 한 달 동안 보았는데 피카소는 일주일 만에 마쳤다. 아들의 실력에 너무 놀란 아버지는 아들에게 붓과 팔레트를 넘겨주면서 더 이상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너무 어려서 결국 입학은 못했지만 피카소가 사실 재현에 상당한 실력이 있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피카소의 입체화는 파격적이지만 거기에는 수백 번 반복해 그린 비둘기의 발이 있었다. 요즘처럼 혁신과 창조가 아니면 시답잖게 보는 세상에서 이러한 반복의 가치를 제대로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첫사랑, 첫눈, 첫아이 등 '처음'을 유독 강조하는 말 쓰임새만이 아니라 신제품, 혁신, 신산업, 새정치 등등 이래저래 새 것이 우월한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보면 무수한 반복의 연속이다. 하루를 시작하면 배우자, 자녀, 직장동료 등 늘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얼추 비슷한 시간에 대체로 같은 곳에서 밥을 먹는다.


몇 년 전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 문득 김연아 선수가 대학으로 돌아가 낯선 공부를 하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시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지닌 분이 쓴 칼럼을 읽었다. 그에 따르면 정작 힘든 것은 운동을 하다가 책상에 앉아 시험 공부하는 게 아니라 대학 생활의 '지루하고 시들한 것'의 진수를 깨달을 만큼 평범히 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당장 돈도 명예도 업적도 될 수 없는 것들에 '턱없이 진지하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곧 새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겹도록 다시 또 다시 비둘기의 발을 그리고 있는 세상의 모든 피카소들에게 또 다른 한해가 시작된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0209:29
    자식 먹이고자 시도한 부업이 사기…보호망은 전혀 없었다
    자식 먹이고자 시도한 부업이 사기…보호망은 전혀 없었다

    "병원 다니는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맛있는 걸 못 먹어서…." 지난달 14일 한 사기 피해자 커뮤니티에 올라 온 글이다. 글 게시자는 4000만원 넘는 돈을 부업 사기로 잃었다고 하소연했다. 숨어 있던 부업 사기 피해자들도 나타나 함께 울분을 토했다. "집을 부동산에 내놨어요." "삶의 여유를 위해 시도한 건데." 지난달부터 만난 부업 사기 피해자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아이 학원비에 보태고자, 부족한 월급을 메우고자

  • 25.12.0206:30
    "부끄러워서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해"…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업사기 대처법 ⑤
    "부끄러워서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해"…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업사기 대처법 ⑤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를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전문가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부업 사기를 두고 플랫폼들이 사회적 책임을 갖고 게시물에 사기 위험을 경고하는 문구를 추가

  • 25.12.0112:44
    부업도 보이스피싱 아냐? "대가성 있으면 포함 안돼"
    부업도 보이스피싱 아냐? "대가성 있으면 포함 안돼"

    법 허점 악용한 범죄 점점 늘어"팀 미션 사기 등 부업 사기는 투자·일반 사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업 사기도 명확히 전기통신금융사기(보이스피싱)의 한 유형이고 피해자는 구제 대상에 포함되도록 제도가 개선돼야 합니다."(올해 11월6일 오OO씨의 국민동의 청원 내용) 보이스피싱 방지 및 피해 복구를 위해 마련된 법이 정작 부업 사기 등 온라인 사기에는 속수무책인 상황이 반복되

  • 25.12.0112:44
    의지할 곳 없는 부업 피해자들…결국 회복 포기
    의지할 곳 없는 부업 피해자들…결국 회복 포기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나날이 진화하는 범죄, 미진한 경찰 수사에 피해자들 선택권 사라져 조모씨(33·여)는 지난 5월6일 여행사 부업 사기로 2100만원을 잃었다. 사기를 신

  • 25.12.0111:55
    SNS 속 '100% 수익 보장'은 '100% 잃는 도박'
    SNS 속 '100% 수익 보장'은 '100% 잃는 도박'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기자가 직접 문의해보니"안녕하세요, 부업에 관심 있나요?" 지난달 28일 본지 기자의 카카오톡으로 한 연락이 왔다.기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1.2709:34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1월 24일)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에 출연한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장동혁 대표의 메시지는 호소력에 한계가 분명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이대로라면 연말 연초에 내부에서 장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동훈 전

  • 25.11.1809:52
    홍장원 "거의 마무리 국면…안타깝기도"
    홍장원 "거의 마무리 국면…안타깝기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 지난 7월 내란특검팀에 의해 재구속된 윤석열 전 대통령은 한동안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특검의 구인 시도에도 강하게 버티며 16차례 정도 출석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의 태도가 변한 것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증인으로 나온 지난달 30일 이후이다. 윤 전 대통령은 법정에 나와 직접

  • 25.11.0614:16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1월 5일) 소종섭 : 이 얘기부터 좀 해볼까요? 윤석열 전 대통령 얘기, 최근 계속해서 보도가 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군의 날 행사 마치고 나서 장군들과 관저에서 폭탄주를 돌렸다,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강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