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 없는 벤처캐피털 "상장 임박한 기업에만 투자"
기술력 있어도 초기 스타트업 투자 못 받아
성공해도 M&A·상장 등 엑시트 '하늘의 별따기'
해외투자 유치도 힘들어 "처음부터 해외 창업"
올해 설립 3년 차를 맞은 콘텐츠 플랫폼 스타트업 A대표는 해외로의 법인 이전을 고민하고 있다. 스타트업 성장을 위한 가장 첫 투자인 시드투자 유치 후 추가 투자를 유치하지 못하면서다. 당장 몇 달 안으로 시드 투자금이 메마르면 사업 운영이 차질을 빚게 된다. A대표는 "사업이 매출을 올리기 시작했지만 서버 확충, 인력 충원 등을 할 여력은 되지 않아 추가 투자가 절실한 상황"이라면서 "벤처캐피털(VC) 십여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냉담해 이럴 바엔 스타트업 시장이 가파르게 크고 있는 중국, 일본으로 터전을 옮겨 다시 시작할까 싶기도 하다"고 토로했다.
국내 스타트업 시장에서 A대표와 같은 고민을 하는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이미 창업해서 성공한 '선배 창업자'들에게 비슷한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B2B(기업 간 거래) 자율주행기술로 2017년 창업해 코스닥 기술특례 상장을 준비 중인 서울로보틱스의 이한빈 대표는 "지금 다시 창업한다면 쿠팡처럼 미국 본사에 한국 자회사를 두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라고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말했다. 외국 투자유치를 해 한국으로 외화를 들여오는 과정이 너무 번거로운 데다 국내에선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를 통해 엑시트(자금회수)도 쉽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벤처캐피털 아닌 세이프티(Safety) 캐피털"
그나마 상장 문턱까지 간 서울로보틱스는 상황이 좋은 편에 속한다. 초기 스타트업들은 생존을 위한 투자 유치조차 버겁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벤처투자 규모는 2021년 15조9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이후 줄곧 큰 폭으로 하락하다, 지난해 11조9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9.5% 증가해 반등에 성공했다. 하지만 당장 돈이 급한 초기 스타트업들은 벤처투자 규모가 커진 것을 여전히 체감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VC 입장에서 목표 실적 달성이 가능한 '수익모델이 검증된' 후기 스타트업에만 뭉칫돈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벤처투자 실적에서 설립 3년 이하 초기 스타트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26.9%→2023년 24.6%→2024년 18.6%로 급감했다. 대신 7년 초과 후기 스타트업 비중은 38.7%→47.3%→53.5%로 급증했다. 어느 정도 매출이 나고, 상장이 임박한 '안전한' 투자에만 몰린 셈이다. 이런 상황을 하승재 에이아이비즈 대표는 "모험을 해야 하는 벤처(Venture) 캐피털이 아닌, 세이프티(Safety) 캐피털"이라고 비꼬았다.
스타트업 생태계 '선순환 구조'가 없다
후속 투자를 못 받아 폐업하는 스타트업은 급증하고 있다. 벤처투자 플랫폼 '더 브이씨'에 따르면 기존에 투자를 유치한 이력이 있던 스타트업 중 후속 투자를 못 받아 폐업한 기업은 2021년 104곳에서 2024년 170곳으로 급증했다.
VC 업계에서는 "우리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국벤처투자, 한국성장금융 등에서 쏴주는 정책 자금을 바탕으로 은행, 보험, 기업 등 출자자(LP)를 모집해 펀드를 구성하는 업계 특성상 펀드 수익률이 잘 나와야 다음 펀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 VC 대표는 "전체 벤처투자 규모가 성장할 때는 초기 스타트업 주식을 넘길 곳이 다른 VC, 사모펀드, 중견기업 등으로 많아진다"며 "하지만 지금처럼 위축돼 있을 때는 구주를 떠넘길 곳이 적은 데다 유일한 탈출구인 코스닥 상장(IPO)만 쳐다볼 수밖에 없어 후기 스타트업에 먼저 손이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운용자산(AUM) 1조원대의 대형 VC 대표는 "VC의 본분이 성장 가능성 높은 스타트업에 도전적 투자를 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면서 "IPO를 통한 투자 회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M&A가 활성화돼야 하지만 지분 처리 문제 등으로 국내에선 쉽지 않다"면서 "이런 상황이 지속되니 많은 VC가 시장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 잘 버틸 수 있는 후기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벤처투자 등의 자료를 보면 국내와 글로벌 VC는 회수 유형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2024년 3분기 기준 미국 VC의 회수는 M&A가 72%를 차지했다. 반면 국내는 2024년 기준 M&A와 바이아웃, 구주 매입 등을 포함한 '매각'은 54.4%에 그쳤다.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2022년 기준 M&A를 통한 VC 회수는 0.7% 불과하다고 분석한 바 있어 국내 시장에서 M&A를 통한 회수는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국내 VC의 투자금 회수는 IPO에 많이 의존하는 상황이다. 2024년 기준 IPO를 통한 회수 비중이 30.6%에 달했다. 미국 VC는 2024년 3분기 기준 회수 유형에서 IPO가 차지하는 비중은 6.5%에 그쳤다.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 원장은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선순환 구조가 전혀 구축돼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는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이 2700여곳으로 너무 많아 제대로 된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코스닥 상장을 통한 회수가 어렵고, 투자 선순환은 사라졌다"면서 "지난해 코스닥에 상장한 VC 투자기업이 70곳이다. 10%를 늘려봐야 77곳에 불과한데, 기술 창업은 한 해 6만곳이나 이뤄져 의미가 없다"고 분석했다.
지금 뜨는 뉴스
유 원장은 정부가 나서서 M&A 활성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른 스타트업, 중견·대기업이 6만곳의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M&A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정보가 전혀 없어 연결되지 않고 있다"면서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 있다면 매출이 없는 스타트업이라도 적극적으로 나설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정부가 나서서 이들을 매칭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시영 기자 ibpro@asiae.co.kr
이승진 기자 promotion2@asiae.co.kr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