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형 VC 투자, 초기 투자 확대 효과 적어"
한국 시장 규모 한계…글로벌 네트워크 확보해야
기술력 가려낼 실력도 부족…한 곳 투자하면 '우르르'
바이오블록체인→플랫폼…유행따라 투자하다 리스크 급증
요즘 창업 초기 단계 스타트업들이 투자 유치를 위해 VC 문을 두드릴 때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기술력 검증 등을 책임지고 먼저 투자 약정을 할 VC를 찾아오면 그보다 액수는 적지만 투자하겠다는 뜻이다.
미래 유니콘이 될 스타트업들이 한국을 떠나고 싶은 이유 대부분은 투자와 관련이 있다. 40년 넘는 업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VC 업계의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부분 VC가 정부가 내려주는 모태펀드만 바라보는 '천수답' 구조인 데다, VC 중에 기술력을 가려낼 실력이 없는 곳도 많다.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가진 초기 기업을 발굴한다'는 모험자본의 순기능은 점점 퇴색하고 있다.
모태펀드 줄이니 VC 투자 축소, 스타트업에 직격탄
1981년 한국기술개발(KTDC)을 시작으로 1986년 관련법이 제정되면서 공식화된 국내 VC 업계는 불혹의 장년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 정책자금인 모태펀드만 바라볼 뿐 스스로 독립할 능력은 키우지 못했다.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모태펀드 투자금액은 2021년 3조9668억원 규모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022년 2조7938억원, 2023년 2조4987억원을 기록하며 지속 감소했다. 지난해엔 2조8039억원으로 전년 대비 소폭 회복세였지만, 2021년 대비 여전히 30%가량 쪼그라든 상황이다.
윤석열 정부 기간인 최근 3년간 모태펀드 자금이 축소되자 다수의 VC가 신규 투자를 축소하거나 뒤로 늦췄다. VC 대표들도 투자 혹한기에 따른 업계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호소한다. A사 대표는 "요즘 국내에선 초기 비상장 쪽 투자가 거의 메말랐다고 보는 게 맞다"며 "초기 기업은 유동성 영향을 강하게 받는데, 지금은 자금이 다 묶여 있고 갈 데를 못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 의존형 VC 투자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대형 VC인 B사 대표는 "정책자금 중심의 구조에서는 출자자(LP)들이 초기 기업의 리스크를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며 "결과적으로 한 곳이 투자하면 다른 VC들도 뒤따라가고, 후행 투자만 반복된다. 이런 구조에선 유행이 바뀔 때마다 쏠림 현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최영근 상명대 교수 등이 발표한 ' VC 시장개입 정책의 실효성에 관한 연구' 논문도 한국의 정부 주도형 VC 투자가 초기 단계 투자를 확대하는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2016년 이후 VC 펀드에 대한 정부 자금 지원이 증가했지만, 초기 단계 투자는 오히려 역성장했다는 것이다. 논문은 "한국이 민간 중심의 VC 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선 정부가 직접적인 금융 개입보다 선진 투자 방법 및 세제 혜택과 같은 제도적 관점에서 벤처 생태계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짚었다.
투자전략 차별화 부재…"뻔한 투자, 업계 성장 막아"
딥테크 스타트업 C 대표는 "투자설명(IR)을 위해 찾아가는 VC 10곳 중 1곳 정도만 이해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큰 규모의 VC들은 분야별로 박사급 심사역이 있다. 하지만 이들마저 실무 경험이 적어 업계 네트워크가 없다 보니 진짜 기술을 가려낼 능력이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특정 분야에서 '잘 보는 곳으로 소문난' 특정 VC 한두 곳이 투자하면 다른 VC들도 우르르 몰려가 함께 투자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시장 환경이 급변할 경우 VC 업계 전체의 수익성이 악화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VC 투자금은 바이오에서 블록체인으로, 그리고 비대면 플랫폼 기업으로 쏠렸다. 블록체인 분야를 예로 들면, 관련 스타트업 투자금은 2021년 1조311억원에서 이듬해 4235억원으로 급감했다. 2023년과 지난해엔 각각 301억원, 124억원으로 곤두박질쳤다.
B사 대표는 "VC 개수는 대폭 늘었는데, 서로 투자 스타일이 지나치게 비슷하다"며"시가총액이 수천억 원에 불과한 기업공개(IPO) 직전 회사를 뜯어보면 투자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VC가 10개를 넘는 일이 부지기수다. 결국 언제, 얼마나 투자했느냐의 차이만 있고, 스타트업을 보는 관점이나 시선이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규모도 고만고만…스타트업 덩치 커지면 외국계만 투자
국내 VC들은 덩치가 커지면 결국 더 큰 돈을 버는 사모펀드(PEF) 부문으로 사업을 확대한다. PEF나 VC 모두 운용자금 규모의 일정 부분을 관리 수수료로 받은 후 펀드 청산 때 성공보수를 받는 사업구조이다 보니 더 큰 자금으로 더 많은 돈을 버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내에서는 500억원 이상을 한 번에 쏠 만한 VC가 없다.
결국 덩치가 커진 예비 유니콘은 해외 VC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야놀자, 마켓컬리 등의 후기 투자유치에 힐하우스캐피털, 세쿼이아캐피털 등 외국계 VC만 투자할 수 있었던 이유다.
올해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퓨리오사AI가 미국 메타로부터 '1조2000억원에 팔라'는 제안을 받은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퓨리오사AI 측이 고심 끝에 메타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국내에선 VC 스무 곳을 모아도 메타만큼의 투자 여력이 없다.
박대희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 대표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스타트업 글로벌 경쟁력 강화 정책토론회에서 "한국은 VC 규모가 너무 작은 반면 미국은 시장이 가장 안 좋을 때도 1개 분기에 20조원 규모가 투자된다"며 "글로벌 VC들과 스타트업을 연결할 해외 파트너도 별로 없어 해외 VC가 한국 스타트업에 관심을 가져본다고 해도 마땅한 채널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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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은 한국 벤처투자 시장에 VC가 약 240개 사, 액설레이터(AC)가 약 450개사에 달한다"며 "정부 정책도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VC 자체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조시영 기자 ibpro@asiae.co.kr
이승진 기자 promotion2@asiae.co.kr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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