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제가 대학에 갈 무렵 몇 년 동안은 이례적으로 자연과학이나 공학계열의 일부 학과들이 의대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자연계열의 전체 수석이 물리학과로 진학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공대에 다니던 저는 그런 분위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물리학과 수업을 듣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물리학, 특히 이론물리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천재성에 압도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천재들 틈바구니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최근 천체물리학계에는 '천재'와 관련된 작은 소동이 하나 있었습니다. 만 일곱 살에 대학에 입학한 송유근 학생의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가 미국천문학회가 발행하는 천체물리학저널에 게재됐다가 표절혐의로 취소됐기 때문입니다. 한쪽에서는 이 사건을 박사학위 지도교수의 과보호가 빚어낸 표절사건이라고 해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빗나간 여론에 학술지까지 굴복한 여론재판 사건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반된 주장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저자들이 게재된 논문과 유사성이 매우 높은 학술대회 발표 논문을 공식적으로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표절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있는 '관행'인가 하는 것에 의견이 다소 엇갈리고 있습니다. 제가 논문을 쓰는 분야의 기준으로 보면 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만, 천체물리학계는 조금 다를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논란 그 자체보다 송유근 학생이 겪을 마음고생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중고생의 학부모로서 저는 대치동 학원가를 밤늦게 지날 때 공포감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더 공부시켜야 할 것 같다는 두려움과,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죄책감이 교차하는 것이지요. 최근에는 영화 '사도'를 아이들에게 공부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기 위해 이용한 학부모들이 있다는 황당한 소식도 들었습니다. 영화의 다면적인 함의를 한사코 거부하고 '공부를 게을리해 죽은 사도세자와 공부를 열심히 해 살아남은 정조'라는 이야기로 영화를 요약할 만큼 피폐해진 것이지요. 올 초 개봉했던 영화 '위플래시'에서도 죽도록 공부해야 성공한다는 매우 편의적인 해석을 찾아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영재교육 열풍도 여전합니다. 유치원에서 중학생 사이의 기간 동안 영재성 검사니 영재교육원이니 하는 광고에 마음 흔들려보지 않은 학부모가 별로 없을 겁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사실 선행학습인데도요.
우리 아이도 영재이기를 갈망하는 공부만능사회에서, 나이 일곱 살에 슈뢰딩거 방정식을 척척 풀어내는 능력을 나타낸 아이에게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시, 그리고 뭔가 큰 것을 터뜨려주기 바라는 사회적 조급증이 쏟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송유근 학생은 그런 부담을 꽤 긴 시간 동안 혼자 견뎌왔을 것입니다. 이번 사건의 전개과정에서도 그는 '그럴 줄 알았어'라는 비아냥과 '천재를 지키자'는 감정적인 주장들 틈바구니에 옴짝달싹 못하고 끼어 있습니다.
어떤 이가 한 분야에 특별한 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사회적인 존재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논란에 뜬금없이 끼어든, 천재는 군 면제를 시켜주자는 주장도, 그리고 천재는 공부로 나라에 봉사해야 한다는 이른바 애국적 입장도 지나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어떤 개인적 재능도 사회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키가 아주 큰 사람이나 노래를 매우 잘 부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농구선수나 가수가 돼야 할 심각한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삶에는 지름길이 적습니다. 실수를 통해, 그리고 좌절을 통해 익히는 것들도 많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통해 그가 열여덟 살의 박사라는 놀라운 기록을 이뤄야 한다는 혹은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가 돼야 한다는 따위의 부담을 좀 덜어낼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천재와 영재에 대한 우리의 기다림도 조금쯤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 각자 모두, '세계적인 천재'는 결코 아니지만, 꽤 괜찮은 사람들 아닙니까.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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