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고형광 기자] 재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기업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관행처럼 대기업에서 정치 자금을 수혈했던 군사정권과는 달리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어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만 김 전 대통령은 강도높은 '재벌 개혁'을 추진하면서 대기업 등 재계와 적지 않은 갈등을 빚었다. 몇몇 재계 총수들과는 퇴임 시절까지 긴장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때로는 비리 혐의로 구속된 총수를 사면해 재기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서거 소식이 전해진 뒤 재계에서 "애증(愛憎)이 교차한다"는 술회가 나오는 이유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곳은 삼성이다. 김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추진한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문어발식 확장을 반대한 김 전 대통령의 벽에 가로막혔다. 그는 처음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된다"며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94년 11월 호주에서 '세계화'를 국정지표로 내걸면서 입장이 바뀌었고, 결국 김 전 대통령은 그 해 12월 삼성의 승용차 사업 진출을 허가했다. 다만 김 전 대통령은 삼성의 자동차 사업을 허락하면서 갖가지 단서를 달았다. 현대 ,대우, 쌍용 등 기존 업체들의 현직 및 향후 퇴직자 중 2년 이상 경과하지 않은 인력의 채용을 배제시키는 등 삼성 입장에서 불리한 조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존 업체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5년 4월 중국 북경에서 특파원들과 오찬을 하면서 "우리나라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김 전 대통령은 분노했고, 방미 수행단 기업인에서 이 회장을 빼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정치자금 100억원을 전달한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형이 선고된 이 회장을 1997년 10월 특별사면ㆍ복권했다. 이 회장에게는 첫 번째 사면ㆍ복권이었다.
현대그룹은 김 전 대통령과의 악연이 92년 대선 때부터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대권을 놓고 경쟁했다. 대선에 패배한 정 전 명예회장은 1993년 1월 출국 금지를 당한 데 이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또한 현대그룹 계열사들은 고강도 세무조사와 채권발행 제한 등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등 현대그룹은 김 전 대통령 임기 동안 수세적 경영을 해야 했다. 정 전 명예회장은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사면ㆍ복권됐다. 김 전 대통령은 사면 후 정 전 명예회장과 한 차례도 만나지 않는 등 불편한 관계를 이어 가다 정 전 명예회장이 2001년 3월 타계하고 나서야 "대업을 이룬 분이 가시니 아쉽다"며 '사후 화해'를 했다. 정 명예회장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92년 대선 이후 나와 현대에 가해진 정치보복은 생각하기도 싫다"고 회고했다.
재계 3위인 SK그룹도 김 전 대통령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전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SK그룹이 1992년 8월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내자,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 전 대통령이 '사돈 기업 특혜'라는 반대 주장에 동참했다. 당시 유력 대권 후보였던 김 전 대통령의 반대는 SK그룹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결국 SK는 사업권을 반납했고, 1994년 6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후에야 통신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고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을 당시 YS 정부의 '업종 전문화'를 명분으로 한 30대 그룹 규제에 대해 "기업이 전문화 정책으로 분산되고 없어지면 누가 책임지느냐"며 반발하면서 김 전 대통령과 갈등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후 SK그룹은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잇따라 조사를 받는 뼈아픈 전력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이던 1997년 한보철강, 삼미그룹, 기아자동차 등이 연이어 부도가 났고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는 상황을 맞는다. 결국 1997년 11월 한국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했다. 김 전 대통령은 경제계에 많은 관심을 쏟고 강도높은 경제 개혁을 주문했으나, 재임 기간 동안 6차례나 경제 장관을 바꾸는 등 일관성없는 개혁과 무리한 시장개방 정책으로 경제계에 큰 부담을 줬다는 평가도 받는다.
고형광 기자 kohk0101@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