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시중銀에 치명타” 건전성 확보 주문…한계기업 워크아웃 태풍 예고
[아시아경제 강구귀 기자] # A은행은 경기도 내 공단에 위치한 15년차 B 중견기업의 다음 달 기업운전 일반대출 만기를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B를 대상으로 최근 기업상시 평가를 했더니 부실 징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B는 A은행에서 기업운전 일반대출 15억원, 기업운전 한도대출 5억원 등 총 20억원 규모의 여신을 사용했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건설경기 불황과 경쟁업체 증가로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이자 상환도 제때 하지 못하는 '좀비 기업'으로 전락했다. 얼마 전 본사 건물 근저당 설정으로 담보를 보강하며 대출 만기를 신청했지만 결국 A은행은 자금 회수를 선택했다.
금융권이 한계기업 대수술에 나섰다. '좀비 기업'으로 불리는 한계기업(영업이익으로 이자를 내지 못하는 상태가 3년 이상 지속된 기업)을 이대로 둘 경우 금융권 부실을 넘어 우리 경제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좀비 기업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산소 호흡기를 거둬들여 부실 뇌관을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가고 있다. 금융당국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금융당국은 기업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NH농협은행, KB국민은행, KEB하나은행 여신담당 부행장을 만나 건전성 확보를 논의했다. "현재 진행 중인 중소기업 신용위험평가와 11~12월 중 실시할 대기업 신용위험평가 후 발생할 부실에 대비해 대손충당금을 적절하게 쌓으라"는 내용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내년 경기가 어려울 것으로 관측돼 금융권이 신용위험 평가를 더욱 정밀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오갔다. 여신담당 부행장들은 "여신담당에게 대출 연장시 신용도를 면밀하게 보라고 지시했다. 신용도에 따라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워크아웃을 실시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방치했다간 내년 대위기= 좀비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산업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협의체'도 가동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 주재로 기획재정부, 산업통상부 등의 부처 차관과 금감원, 국책은행 부기관장들이 참여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구조적 불황을 겪고 있는 산업은 개별 채권은행 중심의 구조조정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만큼 금융당국은 물론 부처 간 협업이 필요하다"며 "대기업은 경영상황이 악화되거나 잠재부실이 우려되는 기업을 선별검사 해 필요시 즉시 구조조정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한 중소기업은 채권은행이 이달 완료 예정인 정기 신용위험평가를 강화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최근 3년간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마이너스이거나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기업이 대상이었다. 강화된 기준은 '최근 2년간'으로 신용위험평가 범위를 좁혀 세부평가 대상이 지난해보다 325개 증가한 1934개에 달한다.
부실 뇌관 제거에 대한 정부와 금융권의 행보가 이처럼 빨라지는 것은 미국의 금리 인상 계획과 중국 경제 상황 등 대외 여건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좀비 기업 처리에 늑장을 부렸다가는 대한민국 경제가 침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지난 6월 말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발표한 한계기업은 지난해 말 기준 외부감사 대상 2만5452개 중 3295개로 15.2%에 달했다. 한계기업은 2011년 2859개(13.0%), 2012년 2923개(13.1%), 2013년 3148개(14.0%)으로 급증하고 있다. 특히 2005~2013년 한계기업을 탈출하지 못한 기업이 지난해 말 기준 2435개에 달했다. 만성적인 한계기업이 전체 한계기업의 73.9%에 달하는 것이다. C 시중은행 여신담당 부행장은 "내년은 경기가 더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되는 만큼 좀비기업에 대한 자금 회수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 좀비기업 살리느라 벤처기업 기회 놓쳐= 일각에서는 좀비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느라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이 느슨해졌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유의동 새누리당 의원실에 따르면 신용보증기금에서 10년 이상 장기 보증을 받고 있는 기업은 올 8월 말 기준 3741개로 조사됐다. 전체 보증금액만 2조4000억원에 달한다. 20년 이상 보증을 받고 있는 기업이 600개, 30년 이상 된 기업도 6개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책금융기관의 장기 수혈에 의존해 연명하는 기업이 많다는 의미다. 금융권의 부실 기업 정리에 윤창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좀비기업을 살리느라 벤처기업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며 "경기가 더 악화되기 전에 좀비기업에 대한 지원을 끊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실기업에 대해 은행이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명활 금융연구원 기업부채연구센터장은 "좀비기업 정리와 관련해 경영평가에서 감점되지 않게 하는 것과 개인적인 면책이 필요하다. 그래야 보다 적극적으로 자금 회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구귀 기자 nin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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