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낱말 하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신줏단지다. 내겐 아마도 '편집'이란 말이 그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이 깨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단어라 할까. 그 첫눈, 그 첫사랑이 편집에 대한 나의 태도를 몹시 각별하게 만들었다. 물론 내가 말하는 편집은, 신문이라는 미디어 속에서 이뤄지는 고도의 지적이고 감성적이며 영적이면서도 인간적이고, 철저히 인간적이면서도 초인간적인 무엇을 지향하는 어떤 작업에 국한한다. 그것만을 배운 탓이다. 편집이란 말을 비웃거나 가볍게 여기거나 잘못 말하면 부아가 나는 까닭은, 그것이 나의 생의 의미 기반을 허무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간이역을 위해 남은 생명을 모두 복무하려는 어느 영화 속의 철도원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편집이란 말을 버려놓은 것은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에서 어떤 사실을 은폐하거나 미화하거나 변형하기 위해 영상물의 일부를 가위질하는 것을 편집이라 부르는데, 방송의 우스개들을 통해 이 개념을 유포했다. 통편집해주세요. 편집할 거죠? 이런 말들이 일상화되었다. 이 말은 통째로 내용을 없애달라는 말이거나 미화 혹은 조작한다는 의미이다. 텔레비전의 막강한 매체파워는 편집이란 말을 대중에게 아주 얄궂게 심어놓고 말았다. 그 말이 지니고 있던 고유하고 다양하며 신성한 미션은 어디로 휘발하고 '의도'를 다분히 깐 장난질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미디어에서 편집은 그 영혼의 작동이라 할 만큼 중대하며 심각하다. 편집자는 미디어의 뇌와 영혼의 주재자인 셈이다. 오죽하면 '태초에 편집이 있었다'는 명언이 나왔을까. 조물주도 세상을 만들기 이전에 세상의 편집부터 고민했다는 얘기다. 파이낸셜타임스라는 영국의 120여년 된 신문이 일본에 팔렸을 때 사람들이 '영국의 영혼(줄여서 英魂)'이 팔렸다고 놀라워한 것은 그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의 편집은 세계 지성과 분별과 양심의 중심이었고 영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지적인 정부'였다.
아무리 100년의 인류영혼이었다 하더라도 이젠, 돈이 안 되면 팔 수 있다. 수익이 난다 하더라도 내일을 보장하는 비전이 없다면 외국기업에 훌쩍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뉴스 편집을 위해 피를 말리는 사람을 모독해도 되는 건 아니다. 20세기와 21세기 자신의 삶의 기저를 이뤄왔을 지적인 정채(精彩)가 어디서 배태되었는지, 아니 조금 더 나아가 문자문명을 이룬 그 깊고 아득한 향기가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말이다. 편집이 살아있는 한 신문은 죽지 않는다.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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