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후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우리의 주요 수출품은 오징어였다. 1960~1970년대 가발, 신발, 의류 등 노동집약적 품목을 수출했다. 이후 전자, 전기 등 자본집약적 품목으로 바뀌었으나 값싼 노동력에 기초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90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자본집약적 품목을 수출했다.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이다.
이 과정은 모두 '똑똑한 산업정책' 덕분이었다. 산업정책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집중한 정책이다. 정부는 새로운 먹거리를 부지런히 찾아냈다. 그리고 산업정책은 새로운 산업에 맞는 생산요소 노동, 자본, 토지를 지원했다. 경제부처는 예산을 확보하고, 과학기술부처는 R&D(연구개발) 지원을 했고, 노동부처는 필요 인력을 공급했다. 산업부처는 공단을 조성하고 수출시장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산업정책은 위력이 크게 약해졌다. 첫째, 더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산업으로 태양에너지, 로봇, 환경 등이 등장했다. 그러나 대부분 투자 규모가 크다. 그리고 성과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신생에너지에 투자했던 대기업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시장에 융합이 주목을 받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둘째, 산업정책으로 '승자독식'이 발생했다. 정부 정책을 독점하다시피 한 대기업이 성장의 몫을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최종재를 수출하는 대기업과 중간재를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격차가 커졌다. 승자독식이 낳은 '기업의 양극화'는 '사회의 양극화'로까지 발전했다.
산업정책을 대신할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창조경제는 산업정책의 대안이 아니다. 여전히 노동, 자본, 토지를 지원하는 산업정책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인류의 진화는 창조와 혁신에 기초한다. 창조와 혁신은 인류가 가진 유전인자에 가깝다. 그래서 창조경제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이 우리가 찾는 새로운 산업으로 보기 어렵다. 정보통신기술(ICT)은 경제주체 간 거래 비용을 줄이는 역할을 할 뿐이다. '우버택시' '배달 앱' '일당 앱'의 등장이 그러하다. 물론 이 자체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긴 한다. 그 숫자는 매우 제한적이다. 어디까지나 창조경제는 비용의 관점으로밖에 볼 수 없다.
생산요소를 지원하는 산업정책의 대안은 경제주체가 중심이 되는, 그중에서 기업이 중심이 되는 기업정책이다. 경제주체는 가계, 기업, 정부다. 정부의 역할은 세금을 걷고 가계와 기업을 지원하는 재정활동이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기업은 가계(개인)의 생산요소를 구입하고 생산하며, 가계는 거기서 보수를 받고 소비한다.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기업과 가계의 관계는 과거와 많이 다르다. 특히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자체가 기업이자, 가계이다. 자신을 고용하여 기업으로서 생산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윤으로 가계로서 소비한다. 이들의 생산활동은 이윤창출이기보다 생계유지 또는 소비지향이다. 그동안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경기침체 때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정책의 대상이었다.
즉 소비에 초점을 둔 가계의 역할만 강조했다. 이제 이들의 생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들의 원활한 생산활동은 소비의 원천을 확보하는 방법이자, 내수활성화의 기초이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수적인 비중을 차지할 때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지원은 선제적 복지정책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이 생산활동을 못 하게 되면 복지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복지정책의 대상으로 지원하는 것이 기업정책의 대상으로 지원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일하는 복지'와 '생산적 복지'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이 더 효과적인지 알 수 있다.
오동윤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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