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에 쓰이는 악기 종류는 아마 60, 70개를 훌쩍 넘을 것이다. 이 중 대편성 오케스트라에는 대개 20여 가지 이상의 악기가 '선발'돼 배치된다. 그러나 이렇게 오케스트라에 편입은 되더라도 따로 독주회를 갖는 악기는 또 그 중 불과 몇 개 안 된다. 대체로 바이올린이나 첼로, 피아노 등이 주로 독주의 주인공으로 나서고 몇 개의 악기가 그보다 한 단계 아래랄 수 있는 수준으로 무대에 오른다. 다른 많은 악기들은 좀처럼 '홀로'는 연주되지 않는다.
악기에도 주역과 조역, 단역이 있는 셈이다. 게다가 '부익부 빈익빈' 현상까지 나타난다. 자주 연주되는 악기는 작곡가들의 작품도 많이 나오게 돼 레퍼토리가 풍부해지니 또 그 만큼 연주기회가 더욱 늘어나는 반면 무대에 설 일이 별로 없는 악기는 작곡도 활발하지 않아 더욱 기회가 줄어드는 식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희곡 <콘트라베이스>는 소외되고 외로운 처지의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콘트라베이스가 악기의 세계에서 주변부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콘트라베이스라는 제목은 변두리 인생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주연만 있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을 수 없듯이 오케스트라에서도 주연과 조연 외에 단역을 맡은 악기가 없이는 전체적인 화음이 나올 수 없다. 아니, 세상의 적잖은 일들이 그렇듯이 하찮아 보이는 것 속에 실은 보석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개리 카의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듣노라면 첼로와는 다른 이 악기의 장중한 음색을 느낄 수 있다. 콘트라베이스만의 개성과 결에 주목한 연주자에 의해 이 악기는 주역으로 당당히 서게 된 것이다.
그처럼 어떤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가능성과 잠재력에 주목해주고 끄집어내면 그만의 독특한 음색과 깊이가 그 사물과 사람을 주역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어제 교육혁신대회에서 "한국의 교육혁신은 창의성에 달려 있다"는 말들이 많이 나왔다. 창의성을 강조하는 건 좋다. 다만 창의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해, 즉 창의성이 소수의 특출한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오해부터 푸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다. 모든 인간은, 특히 아이들은 모두 '천재'를 갖고 있다. 단 그 천재는 그 아이들을 단역으로 밀어내지 않고 그만의 음색과 개성에 주목해 줄 때 발휘된다. 단역이 없는 학교, 단역이 없는 교실이야말로 창의교육이다. 창의, 창조를 입버릇처럼 외치는 이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게 바로 그것이다.
이명재 기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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